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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낱낱
Book name
저자/역자
정유정
출판사명
은행나무
출판년도
2016-05-16
독서시작일
2021년 06월 23일
독서종료일
2021년 06월 24일

Contents

  피 냄새가 잠을 깨우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피 냄새로 다시 맺음 된다발작의 전조 증세를 알리는 피 냄새의 의미는 곧 주인공에게 내재된 본성을 일깨워주는 각성제라 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은 제목 그대로 인간이 지닌 악의 기원을 찾아간다정유정 작가는 데이비드 버스의 저서를 인용하며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고 말했다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행위가 인간이 윤리적인 규범으로 지정한 것에 어긋나는즉 인간이 규정한 의 범주 내에 들어맞는 행위인 것이다누군가는 본성에 내재된 악을 무시해버리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악에 맞서기도 하며 혹은 한순간에 점화시키기도 한다그런 의미에서 유진은 곧 나일 수도 있고 나의 주변인일 수도 있으며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일 수도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마치 읽는 독자가 유진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네 번의 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혜원의 말을 빌리자면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임에도 그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나도 모르게 유진에게 몰입한 채 책을 읽었다이는 정유정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와 동시에 악이라 규명되는 유진의 행동을 더욱 자명하게 드러내 주는 부분 역시 존재한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설 속 유진과 어머니의 관계그리고 유진과 해진의 관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가 하염없는 두려움을 내 피속에 쏟아넣는 사람이라면해진은 내 심장에 노을 같은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언제나 네편이라고 말해주는 존재였다.”, 56페이지

  유진이 망각을 선택한 사건은 곧 어머니의 일기로써 그 형상이 드러난다또한 유진의 시점이 아닌 타인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도 하다유진의 시점을 따라가던 독자에게 악의 정면을 드러내 주는 도구인 셈이다.

  유진과 어머니의 관계를 바라보니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종의 기원속의 유진과 <케빈에 대하여속의 케빈’ 모두 어머니와의 합일감을 경험하지 못한 인물이며 어머니에게 부정당하는 모습과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그러나 둘은 분명히 차이점이 존재한다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바라봐줬으면떠나지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에 학살극을 벌인다유진은 그저 두려움에 떠는 대상을 뒤쫓아 살해하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둘의 차이점은 사이코패스 기질의 기원에 있다.

  “혜원에 따르면유민과 유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지의 방식이었다유민이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는 성격이라면유진은 모든 채널을 오롯이 자신에게만 맞춘다고 했다따라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도 하나뿐일 거라고 했다나에게 이로운가해로운가.”, 249페이지

  유진은 자신의 어머니가 늘 해진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머니의 시선은 늘 유진에게 향해있었다다만 그 시선은 애정이 아닌 억압으로 유진에게 다가왔다어머니와 이모는 유진의 인생에 있어 전부였던 수영을 그만두게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며 그에게 해로운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이다자신이 살해한 어머니의 돈으로 해진에게 항공권을 보내놓고 놀랄 해진을 생각하며 기뻐하는 유진의 모습이 그의 사이코패스적인 면모와 인간을 평가하는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해진은 유진을 위해 자신이 꿈꾸던 영화 촬영의 마지막 밤도 포기하고, 그의 소망을 들어주려 짧은 여행을 꾸리기도 했다따라서 유진은 해진에게 경멸받고 싶지 않아 한다해진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가 언제나 자신의 편일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통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여느 사이코패스의 이미지처럼 감정이 결여된 듯 보이는 유진도 해진은 내게 순전하고도 온전하게 감정적인 존재였다라고 말한다그러나 해진이 자수를 요구한 순간즉 자신에게 이로운 존재에서 해로운 존재로 바뀌는 순간 유진은 해진을 살해한다해진이라는 인물 덕에 유진의 관계 맺음과 인지 방식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다고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종의 기원>을 읽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가장 인상 깊은 점은 유진이 마냥 납작하게 그려진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롭다고 느껴지는 존재 앞에서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이 한 행동에 후회하는 모습도 보여준다자기중심적인 인지의 방식과 손익을 따지며 행동하는 모습은 우리의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상이며 나 역시 악이라 불리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그렇기에 작가의 말대로 예방주사를 맞았다는 기분으로 나 자신의 종의 기원을 선행했다이제는 내 안에 존재하는 악의 낱낱을 똑바로 바라보고그와 대응할 힘을 길러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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