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단편을 엮어 만든 단편집이다. 나는 원래 이런 단편집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아무래도 장편에 비해 들인 정성이 적을 것 같다는 편견을 갖고 있으며 재미난 이야기 하나가 길게 이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 아닌 불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잘 쓴 글이 아니라면 설정만 늘어놓은 글이 될 것 같고, 아무래도 한 작가만의 책이 아닌 여러 명의 책이라는 것은 완성도가 떨어질 것 같은, 그런 인상들을 내가 단편집에서 주로 갖는다.
그런데도 나는 단편집을 자주 찾는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책을 잘 읽지 않는 나지만 sf 단편, 추리 단편 같은 명확한 장르의 명시는 곧바로 그것을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책을 읽는 데 드는 시간 같은 기회비용을 무섭게 여겨 제목만 보고 섣불리 책을 선택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일까. 단편 여러 개를 읽고 나서 한편이라도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건 성공한 것이다. 그런 희열을 가져오는 순간에 이미 나의 뇌는 중독되었다.
제목부터 너무 거창했다. <한국 SF 명예의 전당>. 지금 생각해 보면 또 낚인 것 같다. 물론 작가 개개인들이 대단하고 이름있는 사람들인 건 맞지만 뭐랄까, 제목이 뜬금없다. 그래도 덕분에 나 같은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 책을 읽게 되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좋은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8개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이야기가 다 와닿았냐, 하면 그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고, 5개 정도는 정말로 재미있었다. 확실히 SF 장르는 글을 잘 쓰느냐 보다는 이야기의 참신함이 더 돋보여야 하는 쪽이라서 단편 각각에서 너무도 다른 참신함을 마주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이래서야 앞으로 SF 장르는 단편집만 찾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건 그냥 설정집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짧은 글일지라도 SF라서 용납이 되는 묘한 맛이 있다.
기억에 오래 남는 몇 이야기를 말해보자면, 첫 번째 단편이 <지신사의 훈김> 이어서 좋았다. 사실 이 이야기는 마지막이었어도 좋을 것 같다. ’이게 SF야?’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장르가 혼합된 이야기인데 그래서 SF답지 않게 묘사가 좋고 따스한 글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라비> 도 좋았다. SF에서는 결점일 정도로 흔한 설정인데 아무래도 인기 있는 만큼 나도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이다.
세 번째 이야기인 <세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점프의 횟수> 는 마치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시리즈 감독이 이 이야기를 읽었다면 당장 드라마로 만들자고 했을 것 같다. 이 책의 다른 단편들과는 분류를 달리하는 느낌이다. 막 그 정도로 참신한 이야기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데 작가가 글을 잘 썼다.
이 외에도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 읽다가 지루한 부분이 있어도 단편이라서 훌렁 넘기고 끝을 마주할 수 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여러 번 읽기도 편하다. 이번에도 참 좋은 책을 읽은 것 같은데 왠지 이번에는 내가 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선택한 것 같다. 참 이런 운은 내가 또 뛰어나다. 로또나 되었으면 좋겠는데 책 읽는 운만 보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운 좋은 사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