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치를 말하다!
현대사회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목표로 해야 할 보다 고차적이고 의미있는 인간활동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노동의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까닭에 평등한 이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귀족제도나 계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노동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활동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도달했다고 평하였다.
생각해보면 현대 사회의 노동생산성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 사무자동화 등을 통해서 기존의 인간의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한다. 이는 독특한 태도가 아니다.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보여준 제노사이드의 경우, 사회에서 인간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 보여주였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전체주의적 과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피룡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금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모던적 태도를 의미한다. 급속한 인구팽창과, 지속적인 과학의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고향 상실의 증대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에 대중들은 실제로 공리주의적 범주의 의미에서 보면 남아돌아가는 사람이 된다. 즉, 잉여 세대의 탄생이다.
이 잉여 세대는 노동이 박탈되었을 뿐이지만, 인간의 모든 것을 잃었지도 하다. 작업으로서 인간 사회에 기여할 방법도, 그리고 행위로서 인간 사회에 참여할 의지도 잃어버렸다. 과연
그가 말하길 근대의 과정은 세계소외의 과정이었다. 청년실업의 시대, 하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작업은 언제나 진행 중이다. 오히려 국가의 쓰임 필요 이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수출 중심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20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탈정치와 탈사회를 말하면서, 정치적 무관심을 토로하는 세대. 과연 그 이전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면, 한나 아렌트의 말이 공감이 간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한다. 이러한 실천철학적 방향을 바탕으로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들, 인간적 활동들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
침묵하고 배타적이며, 소외된 사회 속에 아렌트가 제시한 길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