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보았던 것들을 그 애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그리고 매번 그걸 볼 때마다 동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을지.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진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두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난 계속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었다. * 호밀밭의 파수꾼 중
*
샐린저는 이런 저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아’하며 ‘어’란 주변 반응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다. 이 작가는 작가의 익명성과 은닉을 즐기는 이였기에 사생활에 대해서 상당히 보완이 철저했던 작가라고 할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작년 이 맘때 그가 영원히 자취를 감추어서이기도 했다.
이 책이 유명해진 근원을 따지고 보면, 샐린저를 주제로 영화가 만들어 진 것도 아니었고 오아시스와 같은 밴드들이 콜필드 열풍에 심취해 있어서도 아니었으며 조금 더 접근하여 영화 ‘챕터 27’ 때문도 아닌, 그 영화가 바탕인 된 존 레논 암살 사건 때문일 터다. 존 레논을 암살한 자의 손 안에 들려 있었던 책은 바로 이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암살자, 마크 채프먼은 취조에서 자신도 홀든 콜필드를 동일시 하는 답변들 때문에 이 소설이 전세계에 날개를 펼친거다.
책을 읽고 있자면 책에서 설명하는 ‘자아가 파괴되어가고 있는’이라는 말과 달리 콜필드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책장과 콜필드식 대화는 책에서 눈을 땔수 없게 만든다. 몇몇 구절을 예를 들어 본다면, 기차에서 만난 어네스트의 어머니와 대화에서 콜필드는 그녀를 이렇게 평했다.
‘자기 아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이 생겼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머니들이란 전부 다 조금씩은 제정신이 아니기 마련이다.’
정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깔깔 웃을 수 밖에 없는 구절이다. 그 외에도 해학적이면서 양날의 검과 같은 구절은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교회에 관한 이야기든가, 자신 앞에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풀어 놓는 선생에 대한 콜필드에 대해 왜, 어쨰서 나는 조금 더 빨리 이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까란 아쉬움이 들기까지 한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너무 늦게 읽어버렸을 때 느꼈던 그 기분과 같았고 책장을 덮었을 때 콜필드는 마치, 아주 예전에 사귀었으나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같아 보이기도 해. 많은 이들이 콜필드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 친구와 대화가 안 통하기 전에 어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땡땡볼같은 대화는 불행히도 기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늦게 만나게 된다면 영영 그와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회에 치여 시계바늘같은 생활을 하기 전에 빨리 읽지 않으면 후회할 거다. 이건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