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옷을 샀다. 소매에 커다란 붉은 꽃이 그려진 얇은 여름 카디건이었다.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하던 여름의 초입, 알바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유리창 너머 걸려있는 옷이 할머니 옷이란 생각이 들어 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우리 할머니와 나 사이는 적당히 가깝고 아쉽게 먼 사이다. 더 가까워지고 싶지만, 더 이상 자랑스러운 할머니의 손녀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사이. 항상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지만 이젠 그 돈이 행여나 갚아드리지 못할 애정일까 마음 아픈 사이.
나는 왜 그 옷을 샀을까. 『나의 할머니에게』 가 담고 있는 여섯 명의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윤성희의 『어제 꾼 꿈』에선 가족의 회복을 바라며 마법주문을 외우는 모습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항상 전화로 안전을 당부하며 안부를 물어오는, 항상 사랑한다는 말로 끝맺는 그 전화는 어떤 계절이든 따뜻했다.
백수린의 『흑설탕 캔디』에서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하모니카를 잘 불고 귤로 저글링을 멋지게 하는 우리 할머니, 젊었을 적 노래자랑에서 세탁기를 부상으로 타왔다던 재능 많은 아가씨.
손보미의 『위대한 유산』에서는 할머니 집이 생각났다. 노란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베란다에서 꽃을 만지는 삽화와 겹치는 시간이 있었다. 할머니는 꽃나무를 좋아한다. 어느 봄날, 베란다 가득 흐드러진 철쭉을 배경으로 할머니 사진을 찍었더랬다. 꽃분홍색 할머니 웃음은 어느 꽃보다 향기로웠다.
강화길의 『선베드』에서는 흘러가는 할머니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생각났다. 언제나 멋지게 옷을 입고, 당당하게 행동하던 할머니가 당뇨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느꼈던 감정, 예전같지 않은 당신의 몸과 우리의 모습.
세 모녀가 함께 하는 여행을 그린 최은미의 『11월행』을 보고는 내가 닮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내가 닮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에 대해 떠올리게 됐다.
바쁘게 보내던 시간 속 당신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 건 왜일까. 각기 다른 여섯가지 삶을 산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어쩌면 나는 할머니에게 묻고 싶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당신의 사랑을 받아 당신을 닮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삶을 살아오셨나요. 어떤 행복에 미소짓고, 어떤 슬픔에 눈물흘렸었나요. 마음이 힘들 땐 어떻게 견디셨나요.
늦은 밤, 흐트러진 이불을 가만히 덮어주는 그 손은 이제 거칠어졌고, 손녀는 더 이상 할머니 곁에서 자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를 닮은 손녀는 여전히 할머니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오늘은 할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나의 시간이 흘러 『아리아드네 정원』이 가까워진 때에 그분을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