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은 정확한가 정확하다면 얼마나 ? 많은 것을 기억해낼 수 있는가? 추상의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꿈을 바라보지만 실제로 꿈을 얼마나 재현시켜 낼 수 있을지 혹은 재현시킨다하더라도 대화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얼마만큼 생략되어지는 지 확인할 수가 없다. 심지어 대화의 경우에는 같은 단어라도 개인마다 느끼는 뉘앙스가 다르기에 곡해될 가능성조차 있다. 이처럼 불확실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불완전한 정보에 기댄다는 것은 역설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생각은 보고, 듣고, 느끼는 환경에 메인다.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느끼는 것들도 사실 세상이라는 의식의 틀에 갇혀진 것으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의식 속에 무의식이, 무의식의 내면에 다시 의식이 들어있는 모습. 다시 말해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 서로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양면성을 받아들이는 일원론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의식적 행위 속에서 무의식을 찾아내는 것이 편리한가, 추상적인 무의식 속에서 감춰진 의식을 찾아내는 것이 편리한가. (물론 양측 다 유의미한 접근이겠지만) 나는 전자가 더 중요하면서 편리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융의 심리분석학은 앞서 얘기한 심리분석의 태생적 한계를 이겨내고 보다 타협적이고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주요한 부분 두 가지로는 첫째는 단편적인 결론을 내놓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극에 치닫지 않는‘조화로움’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자아와 그림자의 조화, 의식과 무의식을 에너지의 총량은 같다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여 꿈을 보상을 통한 심리적 균형을 회복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등 책의 곳곳에 ‘조화’에 대한 융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둘째는 진정한 자기실현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다. 개성화personality 는 그런 의미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융은 완전한 자기실현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인식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의식 너머에 있는 무의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동시에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심리 전체에 융합시켜야 한다는 ‘계몽’적 변화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이고 자기 위주의 인식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마주하는 주체로서 우뚝 설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들었을 원론적인 이야기들이다. 언제나 느끼지만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일 지키기 어려운 것이 이런‘기본’들인 것 같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기본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성찰하며 다듬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