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s

>>
Book Reviews
>
공교육은 학생을 바보를 만든다는 파격적인 주장
Book name
저자/역자
개토, 존 테일러
출판사명
민들레 2005
출판년도
2005
독서시작일
2011년 01월 25일
독서종료일
2011년 01월 25일

Contents

국가 독점 교육제도가 학생들의 눈을 이처럼 어둡게 만드는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교육 기회의 균등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기 위해 공교육 강화가 필요하단 이야기만 접했고, 그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저자는 철저한 갈등론자이고 우리 상황에서도 이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되는지는 직접적인 비교 과정이 있어야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교육을 포함한 미국의 제도들을 받아들여 많은 부분이 비슷하니 아주 엇나가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약간 의외였던 점은 미국에서의 자유로운 교육제도를 경험한 이민자들이 한국의 치열한 교육열에 아이를 맡기기 싫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는데, 결국 미국의 교육도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문맹(쉬운 한글 덕분이기도 하지만)이나 산수를 못하는 학생은 없으니, 차라리 지식을 쌓는 면에선 우리나라가 미국보다는 나은 수준인 듯한데 바보 공장이 가동되는 현실은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거대한 체제가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알건 모르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시인의 사회]도 키팅 선생의 실패(물론 마지막 장면으로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도 학교를 개선하겠다고 조물락거려 봐야 소용없다, 바닥에서부터 교육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체제의 전복을 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체제 속에서 ‘올해의 교사’ 상을 수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 교사가 어떠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상을 받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실제적으로 교육 현장은 학교보다 교실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진정한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만약 그렇다면 학생들은 틀에 박혀 일방적인 지식을 전달받는 객체로서의 역할을 벗어나, 저자가 말하는 의미를 추구하고 능동적으로 건전한 인격체를 만들어가며 비판할 줄 알고 토론하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이해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국가 독점 교육제도 안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여기서 이 시도를 한국 교육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 나는 몇 가지 의문점이 고개를 들었다. 첫째로 학생들 중에서도 일부는 총체적 교육을 받기보다 학교라는 기계의 부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받기를 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보가 되어가는 아이들을 구출하자는 희망에 찬 구호가 그런 학생들 앞에선 머쓱해질 수밖에 없다. 설령 학생이 동의한다 가정해도, 구조화된 교육체계의 도움으로 고지를 점령하기 유리한 가정에서는 학부모들이 그런 변화를 가만 두고 볼 리 없다. 그렇게 재생산된 ‘기계의 부품’은 자신들의 자식 세대가 교육을 받는 시기에 자신의 부모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고, 자녀들의 자녀까지 끊임없이 답습해 나가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육을 삶으로 되돌려 보내자는 저자의 입장에 적극 동의하고 내 자식도 가능하다면 홈스쿨링을 하고 싶지만, 양육에 최소한의 에너지도 쏟지 않는 부모들이 있기 마련이고 의무교육이 사라진다면 그런 가정의 아이들은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양극화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교육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마지막으로 조작되지 않은 자유시장 원리에 따라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하는데, 실제 그렇게 규제가 풀릴 경우 제도권의 주입식 교육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교육기회의 균등한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교육을 통해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교육 분야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세계관이 확 트임을 경험했다. 불의한 교육제도를 다 뜯어 고쳐버리고 싶은 열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오며 현실의 벽은 높고 내가 이 불의한 세계를 타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음을 느꼈다. 긍정적 변화를 이루어간다면 이전의 악습을 떨치고 필연적으로 더 좋은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순진한 발상이다. 변화는 언제나 위험을 수반하고 그 시도가 불러오는 갈등으로 인해 오히려 그 전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안정적인 변화의 기초가 되는 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듯 [깨어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이겠지. 최소한 먼저 학교에서 배우는 게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며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붕어빵 틀에 찍혀 나오듯 ‘바보’의 일괄적 생산은 침체되지 않을까? 장래의 특정 이득을 위해 전인격성을 포기시키는 학교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최소한의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Full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