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유교의 씨앗은 쿠테타로 왕권을 쟁탈한 조갑이라는 한 중국인 사내의 정치적 탐욕을
감추려는 목적 아래 뿌려진 것이었다. 기원전 1300년경 황하 유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현장을 우리는 고대 동양 문화의 실록인 갑골문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이 정치적 사건은 교묘하게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전해오다가 공자라는 한 사나이에 의해 후대에 전해졌다. 물론 그 당시
공자는 사건의 내면에 숨겨진 불순한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지 못한 채 도덕만을 외쳐댔다. 그 결과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 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 –p.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