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의 저자는 헤르만 헤세로 1877년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에서 도망나와 공장과 서점에서 일했으며 열다섯 살에 자살을 기도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의 일을 겪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헤세는 스위스로 이사한 1919년을 전후로 삶에서 커다란 위기를 겪고 ‘내면으로 가는 길’에 대해 생각하고 적기 시작했다. 이 책 또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그러나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싱클레어의 삶을 따라가며 마주하는 인물들과 내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처음부터 등장하는 ‘데미안’은 아주 큰 비중을 담당하여 전개되는데, ‘데미안’에게 답장을 받기도 하지만, 데미안을 찾을 수조차 없을 때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모습 속에서 데미안은 내면의 자아를 뜻하는 듯하다. 데미안을 찾고 싶어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나의 마음 아주 깊숙이 자리한 그것에게 숱하게 질문을 던졌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고, 그 존재가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을 억지로 외면하며 어떠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의 마음 깊숙이 존재한 그것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다고 명징한 선택만 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싱클레어는 사랑 속에서도 천사와 악마, 선과 악을 동시에 느꼈는데 이런 모습 속에서 선함과 악함은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던진다. 뿐만 아니라 신은 세계의 절반만을 포용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어쩌면 우리는 ‘신이 포용하는 세계의 인간’만 인정하고 그 이외의 면은 부정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하게 한다.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뤄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해.” p.83
우리는 ‘악함’을 분명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도, 그로 인해 세계는 악함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있음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가, 부정하고 외면해온 세상의 한 부분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착한 신만을 숭배한다던 인간의 결과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일종의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왔던 것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은 아주 귀중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이야기, 살아있는 인간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현실이란 결코 달콤한 것이 아니며 부조화와 무의미, 혼란, 착란의 맛이 난다고 덧붙이면서.
때때로, 혹은 대개 우리는 그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혼란에 스스로를 잃고 거친 급류에 휘말리듯 매일을 살아간다. 작가는 그것을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하며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힘껏 노력하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사람들은 결국 시인 혹은 광인이, 예언가 혹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시도를 벗어남이고, 패거리의 이상(理想)으로의 재도피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무비판적 적응이자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영상이 무섭고도 성스럽게 눈앞에서 솟았다. 수백 번 예감했고 어쩌면 자주 입 밖에 냈지만 이제 비로소 체험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 속으로, 어쩌면 무(無)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이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p.169
그러기 위하여 ‘알’을 인식하는 것, 더 나아가 ‘알’을 깨고 나오기를 투쟁하라는 것이다. 수많은 상황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고 그 원하는 바를 들고 현실과 부딪혀 깨고 나와 세계 위에 서 있기를.
더불어 그 ‘원하는 바’는 꼭 ‘선함’의 척도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소위 말하는 악함에 분류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질책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의 한 모습이라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악한 선택 또한 이해한다.’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의 문언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지 이해에 위로나 용기 따위를 포함하는 의미로써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싱클레어의 두 세계, 싱클레어의 내면의 갈등과 그 선택들을 아주 긴밀히 좇아가 독자로 하여금 비교하여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 무엇으로 나의 세계를 구성할 것인지.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아서 편했던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 불편함 또한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삶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올바른 길은 없다고 말한다. 삶에 있어서의 방향은 내가 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방향키를 내가 쥐고 있는 것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그만큼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소위 말하는 인생의 지표를 좇아 살아간다. 이를테면 결혼이나 안정된 가족, 안정된 직장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대기업과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고, 때맞추어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안정을 이루어라 … ” 이 지표에 대해 헤세는 단언한다.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야. 그러나 그것이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따라 인도(人道)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그러지 않아.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하게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해.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자네를 계속 낚아채 가는 커다랗고 알 수 없는 보편적 힘에 하나의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 더해지는 것을 발견해.” p.142
정해진 좋은 운명보다 진정한 자신을 찾기를, 불안정을 맛보며 천천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살아가는 힘을 그렇게 쓰기를, 그런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