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세상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흑과 백, 지하와 하늘, 악과 선, 혹은 선과 악. 싱클레어의 세상은 빛 속에서 온전히 따뜻하게 감싸져 가족에게 사랑받았지만, 그는 그와 별개로 점점 어둠과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 어둠을 갈망하면서도 벗어나려 발버둥 칠 때, 싱클레어는 운명처럼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과 가까워지면서, 자신이 구분 짓던 선과 악의 경계가 사실은 아주 모호한 것이며 둘을 구분해 하나에 치중하는 것은 모순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후 그는 사랑해마지않던 양친과 그들의 통제에 경멸을 느끼게 된다. 싱클레어는 종교적 윤리와 도덕성에 통제받던 과거를 뒤로 한 채 내면의 갈등과 그 속의 좌절, 어둠을 인정하면서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친구 데미안과 닮게 된다.
소설 <데미안>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성장기의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소년들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의 현실적인 고민을 비현실적인 상황과 강렬한 문장으로 표현한 헤르만 헤세가 처음 이 글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에밀 싱클레어’라는 예명이었다. 누구들은 이 까닭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되고자 했던 것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에 자신의 유년시절을 투영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으로 서술된 이 글에서 주인공의 솔직한 심정과 방황의 내면을 세심하게 볼 수 있었다.
소설의 초반부, 싱클레어는 아주 어린 소년이다. 어리고 어리석은 그의 행동은 우습고, 언젠가 도망치는 장면에서는 답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가 마주한 불확실성과 혼돈, 그리고 작은 선택들 속에서 스스로를 단단히 세우려 애쓰는 모습에서 강한 기시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곤 깨달았다,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싱클레어는 결국 지난 날의 나였음을. 이 소설의 진가는 단순한 사건의 연속에 있지 않다. 싱클레어가 자신의 세계와 내면을 시험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을 따라가며 독자는 자신의 방황과 지난 선택을 되짚어보게 된다. 글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헤세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상징적인 표현이다. 알, 아브락사스, 두 세계의 경계 등 수많은 상징은 독자 개인의 경험과 사유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독자는 그 해석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자아의 의미를 스스로 사유하게 된다. 그러니 이 작품을 단순한 성장 소설을 넘어 ‘실존주의’를 탐구하는 철학적 여정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하나의 글이 독자에게 닿아 무한히 확장하는 것. 바로 그 지점이 <데미안>이 세대를 넘어 꾸준히 사랑받는 까닭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종종 한계에 부딪힌다. 본디 사회적 기대란 괴롭고 타인의 시선은 숨이 막히는 법. 남들이 세워둔 정답에 나를 끼워넣다보면 이대로 나를 영영 잃을 것만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 소설 <데미안>은 그 외로운 길 위에 선 모든 이에게 조용한 확신을 건넨다. 시공간을 넘어 수많은 이들이 이미 같은 고뇌를 거쳐왔고, 그 경험이 비로소 그들을 성숙하게 했다고. 오래 전에도 같은 길을 걸어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데미안>이라는 이름으로 남았으며, 이것이 여전히 사랑받는 소설임을 본다면 그 외로움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질지도.
몸부림이란 삶을 관찰하고, 선택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 소설은 그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그 몸짓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바라는 결말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