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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징계
저자/역자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명
민음사
출판년도
2013-09-02
독서시작일
2024년 10월 30일
독서종료일
2024년 11월 19일
서평작성자
정*원

Contents

들어가며…

 

작가는 주인공 와타나베를 지나치게 성숙한 사고를 하는 대학생으로 설정하며, 마스터베이션부터 구강, 삽입 성교 등의 성적 쾌락을 실컷 ‘대리달성’하고도 끝에는 ‘허무’가 찾아온다는 권위주의적 ‘교훈’을 피력한다.1) 이를 보고 있자니 ‘노르웨이의 숲’이나 ‘상실의 시대’보다는 ‘음란을 덮는 예술이 되고 싶었습니다.’의 제목이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은 친구의 애인을 취하고, 간통을 즐기고, 정신적으로 불우한 아줌마를 탐한, 에로티즘에 미친 ‘소시오패스’가 상실과 죽음으로부터의 ‘통증‘을 논한다는 것도 심심한 웃음을 주는 점이다.) 결국, ‘외설’을 피하기 위해 에로 행위에 ‘사유’를 첨가하여 따분한 ‘가르침’을 주는 사회 굴복적 소설인 것이다. 성(性)의 오락성을 징계하고 허무주의로 도피하는 모습 그러니까, 성교 후에 쾌락보다 교훈을 우선 서술하는 본성배반성은 어제의 ‘자위행위’에 도덕적 귀책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제조된 ‘카타르시스’인 것만 같다.

1)가령, 나오코의 나체를 보며 ‘흥분’보다 과거와 현재의 육체미에 대한 차이를 먼저 고찰 하는 등 대학생 치고는 너무나 깊은 사고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는 소설의 절대 진리를 미루어보면, 와타나베는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소개하여 독자들을 기만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기즈키의 자살로 함께 어울리던 나오코와 짧은 이별을 하게 되고 1년 뒤 우연히 재회한다. 애인의 죽음과 가정의 문제로 정신이 돌아버린 나오코는 변태성욕자 와타나베의 철학적 속삭임에 넘어가 ‘섹스’를 하게 되고 더욱 혼란에 빠지며 요양원에 가게된다. 극한의 욕망주의자 와타나베는 끝까지 나오코를 쫒아 만남을 갈구하고 성교를 요구하며, 모든 것을 잃어 주인공을 ‘구원자’로 여길 수밖에 없는 나오코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는 뻔뻔하게 ‘상실’을 논하고 멋진 ‘사색’을 뿜으며 마무리된다.

작가는 와타나베를 관계의 생성과 단절에 감정이 없는 ‘매력적인 소시오패스 성향의 남성’으로 설정하면서도 음란을 덮기 위한 ‘교훈’의 삽입을 위해 상실과 타인의 죽음에 통증을 느낀다는 ‘모순적인’ 설정을 첨가한다. 또, 온갖 성적 유희를 달성하고도 모든 것은 부질없다는 식의 ‘허무주의’를 설파하기 위해 성교 뒤에 쾌락보다 교훈을 우선 서술하여 성을 징계하는 모습은 불쾌감마저 느끼게 한다. 만연하게 배급된 플라톤의 헬레니즘 사상(육체의 가치를 폄하하고 정신적 우월을 역설함.)에 도전하기 위한 에로티즘 장면을 그린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결국, 사회가 원하는 ‘교훈설화’를 위해 대학생을 과도한 본질주의적 사고를 하는 인물로 제한한 굴복적 소설에 그친다. 뭐, 와타나베를 에로스적 사랑에 해탈하고 지극히 이성적인 애늙은이 정도로 ‘굳이’ 제한하는 ‘대단히 지성적인’ 현대인들에게는 도덕적 정화를 수여하는 베스트셀러가 될 만도 하지만 말이다.

 선술의 조건을 (와나타베를 에로스적 사랑에 ‘해탈’하고 지극히 이성적인 ‘애늙은이’ 정도로 ‘굳이’ 제한하고) 기저에 두고 다시 읽는다면, 꽤 감명을 주는 작품임은 틀림없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과 상실로부터 성장하는 ‘고등적 사고’의 주체인 주인공을 독자 자신과 일체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음탕과 음란 행위가 육체적 쾌락에 그치지 않고 정신적 깨달음을 수여한다는 서술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오르가슴’을 느끼기에 최적화 된 ‘상품’인 것이다. ‘자위행위’를 하며 ‘보수주의적 성도덕’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도덕적 정화를 선물할 작품을 꼭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덧붙이며…

 

글이란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일종의 ‘놀이’다. 정형화되어버린 죽음과 상실의 ‘기초’를 해방하고 내재된 ‘애로티즘’을 중심으로 탐독했다. 그러나 나는 노르웨이의 숲에 따라붙는 ‘야설’이라는 꼬리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교 후에 쾌감보다 교훈을 먼저 느끼며 성(性)을 ‘외면’하는 모습이 어떻게 야(冶)하단 말인가. 또, 온갖 성적 유희를 실컷 즐기고도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이른바 ‘성의 징계’에서는 피로마저 느꼈다. 성(性)의 불결함을 거부하고 본능적 쾌락의 우선을 바라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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