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긁어대며 억지로 감성을 느끼라 종용하는, 이른바 ‘감성 과도기’가 된 요즘이다. 이 시대에서 박준의 시집은 그 과도기의 일면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전하는 감정은 ‘억지로 느끼게 만드는’ 감성이라기보다 서정적이고 마음속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에 난해함을 가지는 이들이 읽어도 온전히 그의 뜻을 이해할 순 없으나 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눈앞에 덧그려지는 것만 같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라는 제목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이름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라고 밝힌 것처럼, 시에 담긴 주제들은 다소 작고 소박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뜻의 깊이는 광활하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꾀병」 中
수록된 「꾀병」과 같이 문장이 열거된 작품들을 보면 서사성을 지닌 것 같다. 그러나 서사 장르라고 지칭하기엔 묘한 부분이 많다. 서정적이지만 서사를 지니고 있고, 서사를 지니고 있으나 서정적이다. 감성이 과도하게 드러난 것 같으면서도 절제미가 있어 부담스럽게만 읽히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다소 루즈한 감은 없지 않아 있다. 비슷한 소재들의 열거와 나열을 다른 방식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단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주입식 교육의 특성상, 시를 분석하기에 급급했다. 분석하기 위해 시를 읽어온 자들이 이 시집을 읽는다면 본능적으로 분석하듯 뜯어 이해하고자 하겠지만, 그리 읽는다면 시의 매력이 죽어버린다. 이 시에 담긴 의도와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상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공감’하는 것이 주된 키워드가 될 것이라 감히 추측해 본다.
그런 이들에게 이 시집은 좋은 입문작이 되지 않을까. 분석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속엔 시집의 내용이 응어리지듯 남아 자꾸만 이해하게 된다. 박준의 시들은 분석하기 위함이 아닌, ‘이해하고 느끼는’ 시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시를 해석하는 방식은 각기 다양하다. 누군가는 추억을, 누군가는 미래의 가정을, 누군가는 잊은 과거를 승화하는 방식으로 박준의 시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中
시에서 그리 말하듯, 박준의 시는 모든 만남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그것이 비록 아름답지 않은 만남이라 할지라도.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시는 아름다웠다. 갯벌 속 숨겨진 진주를 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모든 걸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지적할 수 있겠으나, 본디 문학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만드는 것에서 의의가 있지 않나 조심스레 발언해 본다.
시라는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독자라 할지라도, 글을 읽으면 정제되고 절제된 내용과 소설을 단어 하나하나에 깊게 함축한 것 같은 작품들을 보며 억지로 감성을 끌어내기 위해 심장을 긁어내는 작품이 아닌, 자연스레 내 안에 숨겨진 감성을 끌어올리는 작품이다. 처음 접한다면 난해하고 이해 가지 않는다 할 수 있겠으나, ‘읽힌다’라는 감각에 초점을 두고 읽는다면 성공한 읽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시들이 산문과 운문의 경계를 흐리는 것처럼, 운문의 시를 읽고 싶다면 이 시집을 선택하는 것을 재고하길 바란다. 운문의 시들이 많긴 하나, 앞서 말한 서사성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은 운문을 바라는 독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함축된 것의 의의를 주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문장들이 열거된 작품들을 보며 다소 산문처럼 느껴져 운문을 원하고 시집을 택한 독자들에게는 실망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현대 시를 읽고 도전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추천하고 싶다. 운문과 산문이 어우러진 글이라 할지라도, 이 시집은 명백히 ‘시’의 형식을 띠고 있는 글이 절대다수다. 시를 어려워한단 이유로 시집을 기피한 사람들에게 좋은 입문작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감성 과도기의 시대에 자연스러운 감성을 끌어낸단 점만으로도 이 시집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