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계를 풍미한 작가로, 그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에 발간되어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로 번안되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시대를 아우르는 상실감과 공허함을 내포한다. 이 방황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서투른 젊음이 겨냥한 꼭짓점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를 잃고 별다른 뜻 없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버린 것 같다”(p. 142)라며 생동감 있게 젊은 날을 누리지 못한다. 친구의 죽음이 가져다준 멍울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모른 채 그는 기즈키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특유의 맑고 투명한 눈 또한 그대로였다. 와타나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기즈키라는 아픔을 나오코와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아늑함을 느낀다. 점차 그녀를 사모하게 되며 구원을 위한 의지를 얻지만, 애석하게도 바람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그녀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진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장례식 이후 무작정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며 쉽사리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침내 본래의 활동 반경인 도쿄로 돌아와서도 “내 기억의 대부분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 이어져 있었다.”(p. 457)라며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허망하게 회고한다. 또한 거리에서 마주친 가을을 바라보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와 죽은 자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기즈키는 열일곱인 채로, 나오코는 스물하나인 채로. 영원히.”(p. 463)라 되새기며 혼자 세상에 남은 괴로움을 토로한다. 이제 더는 그 무엇도 상쇄시킬 수 없는 상흔이 남은 것이다.
죽음에 관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와타나베가 기즈키를 떠나보냈을 무렵에 얻은 깨달음을 통해 나온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p. 49) 이는 곧 삶과 죽음은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으며, 죽음이란 그저 공기 속에 상시 거주하는 것임을 뜻한다. 죽음은 뜻밖의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마저도 나오코의 죽음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와타나베는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p. 454)라며 자신이 기껏 구축한 신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광경을 처참히 지켜본다. 충분히 길을 잃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미아가 되어 질퍽하고 음습한 늪을 홀로 걸어가야만 한다.
이처럼 강렬한 고독이 현존하는 자를 더 외롭게 만들 때, 우리는 알다가도 모를 모순을 떠올리게 된다. 삶의 전제가 죽음이라는 것. 죽어야 인정되는 게 삶이라는 것.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이 순도 백 퍼센트의 기정사실이라 해도 막상 곁에 서면 도무지 담담해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몸소 체험하여 감내해야 할 뿐이다. 마침내 체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로서 납득하기는 쉽다. 태어나 모두가 꼭 한 번은 죽는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시련이 오면 오는 대로 흘려보내야 한다.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을 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내내 줄곧 스무 살 언저리였던 와타나베는 1장에서 37살이 되어 여객기 안에서 추억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나이에 머물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설령 자신의 삶을 통째로 흔든 시절을 보냈다 하더라도.
<노르웨이의 숲>은 속절없이 사무치는 청춘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속수무책으로 상처받으며 청춘이라는 열병을 앓고, 제자리로 찾아오지 못하는 후유증. 우리는 모두 그 한 구절에 속해있지 않은가. 혹은 지나오지 않았는가.
이 책은 죽음뿐만 아니라 사랑, 우정, 사회, 삶에 대한 성찰이 모두 담긴 책이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이 나와 자유롭고 솔직한 언행으로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기도 한다. 소위 청춘의 필독서라 일컬어지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아프다. 경외감, 동질감이 마구 얽혀 읽는 내내 시리도록 아팠다. 따라서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글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다면 보듬어 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