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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발명국도 탐낸 동아시아의 명품, 조선의 닥종이
저자/역자
이정
출판사명
푸른역사
출판년도
2023-05-12
독서시작일
2023년 12월 03일
독서종료일
2023년 12월 10일
서평작성자
김*기

Contents

종이발명국도 탐낸 동아시아의 명품, 조선의 닥종이

사학과 2101450 김은기

혁신적인 기술의 탄생, 제지술 (서론)

이 책은 조선시대 제지 기술을 소개해주는 책이다. 특이하게도 이 책은 흔하지 않은 종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종이라는 사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종이는 화약, 나침반, 인쇄술과 더불어 고대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이다. 종이의 발명으로 지식의 기록이 가능해졌고, 이러한 기록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4대 발명은 세계 문명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중국에서는 문자 기록의 역사를 살펴보면 상나라 때 거북이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 춘추시대 대나무를 엮어 만든 죽간이나 목판, 전한 시기 비단 등에 글을 적는 방식이 있었다. 이들은 무겁거나 비싸 가볍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재료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에 제지술이 발전하고 식물섬유의 종이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중국 후한 시기 환관으로 죽간과 묵을 관리하는 상방령 직책을 맡았던 채륜은 105년 전국의 장인들과 함께 인류 최초로 채후지라는 종이를 발명했다.

버릴 구석이 없는 조선의 상징, 한지 (본론1)

책에 나와 있기로 ‘중국 4대 발명품 중 하나인 종이는 1~2세기경 발명되어 중국과 연결된 한반도에 가장 빨리, 대략 3세기 전후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고,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 기술을 전파한 것이 610년이다. 식물 기반 제지 기술이 이슬람으로 유럽으로 전해지기 훨씬 전이다.’라고 한다. 한반도에 종이는 발명된 이후 개발국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을 통해 빠르게 공유되었다. 한반도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중국에서 사용하던 대나무, 삼, 삼베 등의 재료 대신 닥나무를 이용했다. 기후적 특성상 우리나라는 대나무가 잘 자라지 않고 옷감으로 주로 쓰이는 삼을 종이에 쓰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책의 표현대로 이는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새로운 원료를 구하게 된 것이다. 닥은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고 구하기 쉬운 재료이며 나무 속에 희고 긴 섬유질 내피가 있다. 이것을 활용하여 질 좋은 종이를 만들었다.

제지는 조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산업이었다. 신라시대부터 명망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가장 번영을 누렸던 기술을 가졌다. 조선 제지의 핵심 기술은 도침이다. 도침은 완성된 종이를 쌓아놓고 다듬이질하듯 두드리는 기술인데 한반도에서만 거의 유일하게 사용되는 고급 기술이다. 도침 과정을 거친 한반도 종이는 광택, 밀도, 강도, 먹물의 스밈 등 여러 면에서 모두 강점을 가져 중국, 일본의 인기가 높았고 중국 왕조의 조공 품목이 될 정도로 최상품이었다. 도침 이전에 외발 뜨기라는 중요한 과정도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종이 뜨는 발틀을 한쪽만 고정을 한 다음 섬유를 떠오르게 하고 좌우 모든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 섬유가 서로 얽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 더욱 밀도 높고 단단한 종이를 만들 수 있었다. 세종 즉위 후인 1419년에는 불경을 인쇄할 종이 2만 장을, 1420년에는 후지 3만 5,000장을 바치며 조공품인 금은의 양을 줄여줄 것을 청했을 정도로, 1425년에는 ‘종이를 발명’한 나라인 중국의 황제가 조선 왕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조선의 제지술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기술이었다.

조선에는 도침법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지던 종이 재활용 기술이라는 창의적인 제지 기술이 있었다. 한번 쓰고 난 종이인 ‘휴지’를 쓰레기로 취급하여 버리는 것이 아닌 돌아온 종이라는 의미로 ‘환지’라 명명하여 재활용했다. 이는 조선 종이를 특별하게 하여 조선 후기 종이산업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환지는 신발, 삿갓 등에 활용되었으며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의 갑옷에도 쓰였다. 이는 질기지만 가벼운 한지의 특성을 살려 방호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면화를 키우기 어려웠던 북방의 백성들에게 과거 시럼 낙방자들의 답안지인 낙폭지가 솜보다 낫다고 이를 활용하여 외투를 만들어 입는 것을 반겼다고 할 정도로 한지는 촘촘하고 질긴 소재이다. 이렇게 조선의 종이는 제지뿐만 아니라 활용법까지 만들어지며 그 산업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쓰임새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러한 기술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저자의 표현대로 ‘기지’이다. 기지는 ‘경우에 따라 재치 있게 대응하는 지혜’라는 뜻이다. 이러한 시선으로 과학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지혜, 그 속에 담긴 고민과 노력 등을 알 수 있다. 종이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고뇌와 지혜를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들이었다.

세상에 쉬운 건 단 하나도 없다. (본론2)

조선은 기록을 중시하는 나라답게 수도와 지방에 생산시설을 세우고 장인을 등록시키며 관영 종이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경국대전》에 따라 종이의 생산⦁유통⦁관리를 하려고 시도했다. 모든 읍의 수령에 대해 닥나무밭을 관리해서 닥을 바치도록 하였고, 수령이 바뀔 때 재고를 조사해 고과를 매기도록 한 항목인 닥나무밭 대장을 만들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300여 읍의 닥나무 소출은 지장이 배정되어 있는 서울, 경상, 전라, 충청, 황해, 강원도에서 넉넉히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닥나무가 모든 읍에서 자라지 않았으며, 닥나무의 겉껍질과 속껍질이 저절로 벗겨지지도 않았다. 즉, 전문 기술을 가진 장인이 직접 해체해야 했다. 이에 무게와 부피가 있는 닥나무 가지와 껍질을 꽤나 멀리 옮겨야 했다는 점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까다로운 닥나무 가공 과정으로 생산성은 낮은데 종이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에 물량을 맞추는 것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원재료인 닥나무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종이의 값, 책의 값은 비쌌다. 국가 주도의 관영 생산 체제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 종이 물량 공백을 메꾼 건 유교적 국가체제의 바깥에 있었던 사찰의 승려들이었다. 승려들은 오랜 세월 동안 불경을 찍어내며 익힌 제지술 노하우에 더해 사찰이 산지에 있어서 닥나무에 접근하기 쉬웠다. 지리적 이점은 물론이고 촘촘히 이어진 사회적 연결망까지 갖추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 생산과 유통의 중심은 국가에서 사찰로 옮겨져 갔다. 사찰에는 집을 떠나 절에서라도 살아보려는 이들, 과중한 세금, 역 등을 피해 절로 숨어든 이들, 전쟁, 기근 등으로 고아가 된 이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렇게 또 다른 집인 사찰로 온 이들과 함께 닥나무를 경작하고, 추수하고, 가공하고, 종이를 만들고, 또 먼 길을 같이 이동하며 그것을 전파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연대를 맺으며 종이를 생산, 유통했다. 이러한 닥나무 연대 덕분에 사람들이 종이를 원하는 수요도, 확대되는 지식 시장과 생활용품 수요 등도 모두 안정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고대 과학혁명, 종이 (결론)

종이의 발명은 가히 혁명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를 불러왔다. 종이의 발명으로 인해 문학, 역사 등 다양한 문화가 발달⦁ 변화했고 지금 현재까지도, 신문, 지폐, 책, 교과서, 달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삶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조선 시대에 닥종이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우리 역사에서 닥종이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종이가 가지는 의미가 이렇게 클 수 있는지, 기술이 이렇게 뛰어난지 처음 알았다. 이 속에 얽힌 역사가 다양하고 종이라는 것이 단순히 생산 뿐만 아니라 유통에서의 상황, 다 쓰이고 나서의 그것을 재활용, 재생산하는 상황까지 다양하게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00년 이상 유지될 정도로 성능이 좋은 닥나무로 만든 닥종이, 우리 전통 한지가 탄생할 수 있었던 선조들의 노력과 지혜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종이라는 소재로 된 책을 처음 읽어봐서 신기하기도 했고 또 생소한 만큼 어렵기도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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