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한국 의료의 우수성을 들으며 자라왔다. 아프면 언제든지 집 근처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건강보험 덕분에 부담 없는 가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원비의 압박을 받으며 가족이 해체되는 이야기를 접하면 한국에서 태어나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 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지방 도시에 산부인과가 없어 아이를 출산하려면 3시간 이상 차를 타고 광역시로 나가야만 겨우 찾을 수 있다던가,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가 중환자실 병상과 의사가 부족하여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구급차에서 숨지는 황당한 일이 자주 언론에 소개 된다. 심지어 대한민국 흉부외과의 영웅 이국종 교수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너무 많이 받는다며 병원장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듣는 일까지 벌어진다. 대체 한국 의료에 어떤 문제가 생긴걸까….
개인적으로 필수 바이탈(흉부외과,응급의학과, 산부인과 등)같은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의사들에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누가봐도 죽을 수 밖에 없는 환자를 어떻게든 살리겠다는 신념 하에 살려내는 의사의 윤리관과 직업정신에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내가 읽은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에세이 모음집 \’만약은 없다\’를 읽고 한국의 의료 현실이 내가 생각한 낭만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의료제도에 관한 여러 정보를 찾아보게 되었고, 접하게 된 책이 바로 \’의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성형외과 의사이자 석박사를 뉴욕대에서 경영학을 수료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경영학 이력을 소유한 사람답게 제도와 비즈니스적 차원에서 한국 의료제도를 진단하는데 그 관점이 신선했다. 저자는 애초에 대한민국 의료제도의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가능 하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의 의료제도는 기본적으로 필수의료 항목을 저가로 고정한 뒤 비필수적 의료를 고가로 책정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모델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저가의 감기치료를 받을 다수의 환자들로부터 비타민 주사 혹은 ct 촬영 등등의 고가 비급여 치료를 추가하여 병원의 수익을 창출하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하면 쿠팡과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다. 먼저는 싸게 이용자 수를 늘린 뒤 가끔 있는 큰 수익을 통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한국이 고도로 성장하여 의료비 지출 비용의 상승 보다 돈을 더 잘 벌고 저소득층의 필수의료를 싸게 받쳐줌으로써 과거에는 잘 굴러갔다. 하지만 한국이 고령화가 되어가며 점차 의료비용이 상승하고 보장항목이 과거 보다 폭넓게 보장되자,(급여 항목은 대개 매우 싸게 수가가 고정되어 필연적으로 적자를 유발함) 의료비용 지출이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물가상승률 보다 성장이 낮아지고 둔화되자 그나마도 낮았던 수가 인상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현재의 한국이다. 과거에는 의료비 상승 속도보다 성장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수가를 지속적으로 인상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적자 운영일 수 밖에 없는 응급실과 중환자실 – 병원 입장에서는 이 둘을 줄이고 싶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는 비급여 항목(수익 창출)이 거의 없는 필수의료과 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병원 입장에서 응급실과 중환자실의 운영은 대부분 급여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환자를 받으면 받을수록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게다가 과의 특성상 의료 사고의 위험이 가장 높다. 아무리 의사들이 고귀한 이상으로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다 해도, 환자를 받을수록 적자가 나는 병원은 망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응급환자일수록 많은 약물과 치료 장비가 필요한데 한국의 급여 수가는 고정되어 있기에 법률 상, 정해진 양 이상을 써서는 안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의사들은 그것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약을 더 쓰고, 일회용으로 써야만 하는 장비를 여러번 사용한다. 그것이 그나마 한정된 수가로 운영되는 병원에서 비용을 줄이고 환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에…. 윤리적으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운영하면 망하고 비윤리적으로 운영해야만 그나마 유지가 가능한 딜레마를 필수의료 의사들에게 덮어 씌우는 것이 대한민국 필수의료의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현실을 의대생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비인기과인 바이탈은 현재 신규 전문의는 커녕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들 마저 구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오죽하면 의사들 사이에서 10년 뒤면, 응급 수술은 동남아 의사를 통해서 받을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이야기 마저 들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책이 지방에 공공의대를 설립하거나 의대 정원을 늘리자는 것에 멈추어 있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필수 의료과에 의사가 없으니, 일단 수를 늘리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 아니냐는 논리다. 하지만 애초에 문제는 구조적으로 필수 의료과 지속가능성이 망가져 있어 아무도 갈 생각을 하지 않는 점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제 아무리 부어봤자 물은 샐 수밖에 없다. 설령 그런 식으로 필수의료과의 의사가 많아진다 해도 의사 입장에선 얼마든지 해외로 가거나 다른 과로 도망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의사 협회가 말하는 대로 수가만 올리면 다 해결이 되는 것이냐? 저자는 그런 생각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주장한다. 현재 한국의 의료비 지출의 상승률은 7%로 전세계 최상위권이며 10년 전만해도 선진국 보다 의료비 지출이 절반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수가를 올리는 일은 의료비 지출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져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무섭게 상승해온 GDP 대비 의료비 지출 비율 >
저자는 근본적으로 의료제도를 뜯어 고쳐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현재 민간의사 100%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해외 선진국과 같이 공공의료 70%-민간의료 30%로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대도 사관학교처럼 만들어 사관학교형 의대를 졸업한 사람은 평생 공무원과 같이 필수의료과에서만 일하는 책임을 짊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공공재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므로 애초에 의료시스템을 이원화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것만이 의료비의 급격한 상승을 막을 수 있는 동시에 민간의사의 공급이 늘어나 의사 협회가 반대하는 일도 막을 수 있으며, 당장 필수의료 의사의 공급이 절벽에 이른 현재 국민들의 피해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한다.
의료 문제는 사람의 생명이 걸린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서평을 쓰는 지금도 조심스럽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현행 의료제도의 문제점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매우 심각하고, 근시안적인 땜질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무쪼록 한국의 미래와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은 방향으로 의료제도가 잘 개선되기를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이 의료제도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개혁도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해당 책의 일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