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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말하고 싶었던『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와 진정한 자유에 관해
저자/역자
올더스 헉슬리
출판사명
소담출판사
출판년도
2015-06-12
독서시작일
2022년 05월 16일
독서종료일
2022년 06월 30일
서평작성자
구*진

Contents

  1. 서론

태아가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모든 삶이 결정되는 세상이 있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는 그러한 세상을 가정한 SF소설이다. 이 세계에서는 인공부화기, 현대식 수정 방식, 보카노프스키 처리(Bokanovsky) , 유아 양육소 등, 그 세계만의 방식으로 인구와 사람들을 통제한다. 계급을 나누고 그 계급에 따른 생김새와 생각, 가치관 더 나아가 좋아하는 환경까지 해당 계급이 하는 일에 맞추어져 생산된다.

비록 그는 하급 신분 계층 사람들이 책 때문에 공동체의 시간을 낭비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또한 그들이 지닌 조건반사를 풀어버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유발할 책을 읽게 될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점도 쉽게 납득이 갔지만, 그래도····그렇다. 그는 꽃에 대해서는 이래가 가질 않았다. 왜 델타들에게 심리적으로 꽃을 좋아하지 않도록 유도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가? 참을성을 보이며 부화본부 국장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이들이 장미꽃을 보면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게끔 조건반사를 유도해놓은 까닭은 고등 경제정책을 기초로 삼은 조처였다.

이렇게 생산된 세계국의 사람들은 통제되는 자신의 삶에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통제 하에 누리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진정한 자유를 텍스트인 『멋진 신세계』와 컨텍스트인 저자의 배경에 대해 분석하고, 이 책을 현대에 읽은 독자들이 세계국에서의 삶을 고민하는 이유와 나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본론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자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책『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세계인들과 야만인들이 만나는 순간에서 진정한 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맙소사!” 그녀는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저길 보세요.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모습의 원주민이 옆집의 2층 테라스에서 아주 천천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데, 너무 나이가 많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조심스럽게 한 칸씩 내려왔다. 그의 얼굴은 깊게 주름이 지고 새카매서 오적으로 만든 가면을 쓴 사람 같았다. [······] “저 사람 왜 저래요?” 레니나가 숨죽여 물었다. 공포와 놀라움으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늙어서 그래도.” 버나드는 가능한 한 무관심하게 말했다. 그 역시 놀랐지만 마음의 동요를 보여주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를 썼다. [······] “”그건 우리들이 저렇게 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린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합니다. 내분비 활동을 인공적으로 조절해서 젋은 단계와 평형을 유지해요. [······] 그래서 저런 그들은 저런 모습이 되지 않죠”

세계인들에게 비추어지는 야만인의 모습은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 소마(Soma) 를 선택할 권리, 출산과 육아의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 등을 빼앗긴 사람들이라 비추어질 것이다. 그러나 야만인들에게 보여지는 세계인들도 질병, 고통,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불행해질 권리”를 빼앗기고 더 나아가 나의 삶을 자신이 꾸려 나갈 수 있는 주체성을 빼앗긴 사람처럼 느낄 수 있다. 즉, 서로가 서로를 볼 때 그들은 자유를 빼앗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느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세계에서 사는지에 따라 자유의 기준이 다르게 정의된다.

토론 중 한 조원이 “여러분은 이런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책에서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살지 않을 것이다. 앞써 말했듯이 자유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나에게 정의되는 자유는 더 나아졌다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을 느끼는 삶이다. 그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자기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살아가야 한다. 99번 실패해도 100번째는 성공할 수 있듯이 99번 도전하는, 도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에 따라서 산소를 더 적게 공급합니다.” 포스터가 말했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기관은 두뇌였다. 다음으로는 뼈대. 정상적인 수준의 산소 가운데 75퍼센트만 공급을 받으면 난쟁이들이 태어난다. 70퍼센트 이하로 내려가면 눈이 없는 괴물들이 태어나고 “그런사람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죠.” 포스커가 결론을 지어 말헀다. [······] “하지만 엡실론들의 경우라면 인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포스터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필요하지 않으니까 주어지지도 않는다. (46-47)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그런 노력이 없고 개개인의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다. 정확히는 그러한 노력과 의지를 없앴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과 역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에 접합하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맞춤형 인간으로 태어나고 완성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간다면 자유로운 삶을 보낸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노력과 의지 없이 얻어진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에 있어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신세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생각과 함께 내가 처음부터 세계국에서 태어났다면, 앞서말한 자유의 기준이 세계국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조작된 자유를 느끼며 행복하게 생활했을 것이라 예상된다. 나의 삶에 만족하며 성실히 살며 진미의 소마를 복용하며 반공일을 위해서 2분의 1그램, 주말을 위해서는 1그램, 화려한 동양으로의 여행을 위해서는 2그램, 그리고 달나라에서 어둠의 영원성을 누리기 위해서 3그램을 복용하며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다가 야만인을 만나게 된다면 책 속 세계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유흥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의 반응일 것이다.

  1. 본론

 

본론 1처럼 자유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실제로 늑대무리에서 자라났던 아이를 발견하고는 사람들은 늑대무리에서 구조하여 키웠으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사례가 있다. 이 아이의 생김새는 영락없는 인간이었으나 하는 행동은 늑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러한 아이에게 인간들의 삶을 가르치려 노력하였으나 인간들을 경계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이렇게 야생동물의 무리에서 길러지다 발견되어 구조된 사례는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와 격리된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면 사회화 교육을 해도 인간과 소통하는 능력을 쉽게 갖추지 못한다. 이는 모글리현상(Mowgli Syndrome)이라 하며, 구조된 아이는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는 관측이 있다. 그렇다면 아이가 구조되지 않고 늑대무리 속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재사회화를 하려는 스트레스 없이 이 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학대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 ‘구조’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입장으로 본다면 자신의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왔는데 어느 날 인간들이 가족들과 행복할 ‘자유’를 앗아갔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 아이의 자유를 위해 구조를 포기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를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 사람이 둘러싸인 삶과 사회에 따라 자유라는 단어의 정의가 달라지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사례를 보면 자유와 우리 사회의 억압 간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개인의 자유는 100퍼센트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실현될 수 없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자신의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기엔 너무 삶이 아깝다. 그렇기에 이 사회 속에서 어떠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대해야하는가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가 이 책을 쓸 때, 사회는 한창 산업화가 진행 중이었다. 산업화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했으며 자유 역시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가는 이러한 삶을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해 『멋진 신세계』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정했다고 생각한다. 토론 중 한 조원이 “여러분은 이런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을 받은 조원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책이 쓰여진 이유는 완벽한 계획과 통제 속에 있는 사회를 비판하고자 함이다. 심지어 제목까지도 역설적으로 『멋진 신세계』라고 정한 책을 두고 사람들은 이 세계에서 살지 말지를 고민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도 어떠한 자세로 자신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며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나올 것이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어울려 사회화된 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중 사람들은 선택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한다. 너무 완벽하게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조금은 내려놓고 타인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이론적으로는 쉽다. 그러나 그걸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은 계기가 필요하다. 나같은 경우는 그 계기가 제주도에서 한달 살기를 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목표를 세우고 같이 살았다. 여러사람들을 만나며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같이 살다 보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을 하고 그 사람이 어렸을 때 했던 고민을 난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곤 사람 사는게 거기서 거기구나를 깨달았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20대 때는 20대들이 누구나 하는 고민을 하고 30대인 그 사람도 30대들이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쉽게 다가왔다.

 

  1. 결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본론 2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이 책이 쓰였던 시기는 산업혁명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인간들의 편리함을 위해 계속해서 기술을 개발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발전될수록 인간소외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그 시대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함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영화 ≪모던타임즈≫(Modern Times)와 같이 말이다. 사실 저자는 이 책을 적으면서 자신의 상상이 머지않아 미래의 현실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세상은 아무도 노력하지 않고 그 누구도 이러한 삶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삶. 이러한 삶을 경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개인마다 다르고 그렇기에 변화할 수 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만의 기준을 더 나아진 내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 친구보다 나은 삶, 엄마친구딸보다 더 나은 삶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삶으로 기준을 잡고 타인의 시선을 필요이상으로 의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되었고, 지금도 그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저자가 걱정하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기 위해서는 본론 2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보고 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멋진 신세계』는 영원히 고전의 대열에 문지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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