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다. 방학이면 부모님과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 주소는 경남 양산시 상북면 내석리 수서로 529번지. 명절이면 온 가족이 집에 모였다. 전라도가 고향인 고모부와 거제도 출신인 큰고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과 한미 FTA를 두고 썰전을 버렸다. 초등학생이 ‘여야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협상했다’든지, ‘뉴라이트 사관’이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관심은 오직 밤이었다. 할머니 집 앞에는 나무 정자가 하나 있다. 점심이면 1층에 있는 노인정에서 나온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밤이면 정자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움직이기도 했다. 전래동화처럼 도깨비불은 아닐까. 정체가 궁금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앞에 있는 문구점에서 용돈으로 산 M4 카빈 비비탄총을 들고 정자로 갔다. 그러자 웬걸 반딧불이었다.
제국 육군 소위 미쓰야마 후미히로에서
이 책에서 등장한 조선인 특공대원 가운데 한 명을 소개하려 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한다” 일본 가고시마현 다치아라이 육군 비행학교 인근 호타루 관에서 특공대 복장 차림의 한 청년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식당 여주인 토리하마 토메에게 마지막 말을 청한다. 그는 “아주머니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제 노래를 들어 주시겠어요.”라고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향해 아리랑을 부른다. 조선말로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본 동료들은 입을 굳게 다문 상태로 지켜본다. 그는 일본제국 육군 제6항공군 51대 진무대 소속 소위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가 아니었다. 조선인 청년 탁경현이었다. 영화 호타루(ホタル, 감독 후루하타 야스오, 2001년)는 일본에서 2001년 개봉된 영화이다. 실제,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한 탁경현이 조선인 특공대원 김선재로 영화에 나왔다.
탁경현은 1920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모님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도쿄 리쓰메이칸 중학교와 교토약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취직도 했다. 그러나, 육군 특별조종견습사관생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일본이 1943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도입하면서 병역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황이 점점 일본에 불리해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졌다. 그러자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의 젊은이들도 일본군 장교로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강제징집이 닥치는 대로 이루어졌다. 이는 본토에서부터 식민지까지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탁경현도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44년은 일본에 악몽과 같은 해였다. 제국 연합함대는 1941년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잃는 대패를 당한다. 이후 △과달카날 해전 △사이판 전투 △괌 전투 △레이테만 전투 등 연이은 패배를 겪는다. 당시, 미국은 항속거리만 9,000km에 달하는 초장거리 전략폭격기 B-29를 개발해 태평양 전선에 배치한다. 이후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을 시작한다.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불리한 전황을 바꾸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도 생각해 낸다. 가미카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조직한 자폭 공격대이다. 조종사는 비행기에 폭탄과 어뢰를 장착해 연합군 함대로 돌진한다. 실제, 1943년 필리핀 레이테만 전투를 시작으로 종전까지 총 3,812명의 조종사가 가미카제로 희생됐다. 일본은 이를 특공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 폭탄이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출격 전날 천황이 하사한 술잔을 비운다. 그러면서 동기의 사쿠라를 부른다. 전투가 끝나면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나자고 서로 약속한다. 동료들의 배웅 속에 편도 분의 연료만 채우고 250kg 폭탄이 탑재된 제로센이 출격한다. 전투기는 편대를 이루며 하늘 높이 날아간다. 전투의 초입경에 이르기 전 심장이 터질듯한 공포가 밀려온다. 아래로는 바다를 빼곡히 메운 연합군 함대가 보인다. 조종간을 꼭 잡는다. 표적을 향해 수직 낙하한다. 대공포는 무서운 불을 내뿜으며 총탄 세례를 마구 퍼붓는다. 주위를 둘러본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바다 아래로 사라진다. 남은 건 혼자뿐이다. 비행고도가 빠르게 낮아진다. 그러면서 전투기의 급강하 소리와 함께 무전 비프음이 끊긴다.
조선의 반딧불이 탁경현으로
탁경현은 1945년 5월 11일, 출격 당일 동료들과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는다. 이후 그가 탔던 1식 하야부사 전투기는 오키나와 해상 출격을 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만든 얼룩진 역사 속. 태극기 대신 욱일기를 머리에 감고 사쿠라가 되어야만 했던 조선의 가미카제.
일본 가고시마현 지란특공평화회관에는 이들의 유서와 사진 등 14,000여 점의 자료가 소장 돼 있다. 일본은 2014년 이 가운데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서와 편지 총 333점을 선별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서다. 여기에는 17세의 나이로 전사한 박동훈 등 조선인 가미카제 11명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도 유네스코 일본위원회는 2015년 유네스코에 제출할 세계기록유산 신청 대상에서 이를 제외했다. 태평양전쟁 동안 약 3,600만 명이 사망했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사과하고 희생자와 가족에게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무사도(武士道)와 욱일승천의 정신으로 포장하기에 바빴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으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 그로부터 78년이 지났다. 일제의 35년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GDP(국내총생산) 1,969조 원 규모의 세계적 국가로 성장했다. 나아가 위안부, 강제노역 등 과거사 문제로 시끄러웠던 일본과의 관계도 정상화됐다. △사회 △문화 △정치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의 교류는 늘어만 갔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인 가미카제의 이름은 잊혀 갔다. 2008년 고향에 귀향 위령비를 세우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이유는 ‘조국’이 아닌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조선인 탁경현’ 대신 ‘조선인 가미카제 탁경현’이라는 꼬리표는 죽어서도 그를 따라다녔다. 지금도 그의 영혼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탁경현이 아닌 일본인 미쓰야마 후미히로로. 일본을 수호하는 야스쿠니의 군신(軍神)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위스콘신대학 교수 오오누키 에미코의 저서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오오누키 에미코, 모멘토 출판사, 2004년)에 따르면 가미카제 희생자 가운데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은 총 16명이다. 20세기 일본 제국의 대동아 전쟁에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모든 조선인을 기억하면서. 탁경현이 부른 아리랑이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2만 1천여 명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따듯하게 품어주길 바라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운명의 비애 속에서 밤하늘의 반딧불이가 된 조선인 가미카제를 기억하면서. 책을 덮고 그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본다.
△박동훈 △최정근 △김상필 △이윤범 △카와히기시 시게루(출생연도 및 한국명 불명) △키무라 세이세키(출생연도 및 한국명 불명) △탁경현 △이현재 △김광영 △이시바시 시로오(한국명 불명) △한정실 △노야마 사이코쿠(한국명 불명) △노용우 △임장수△이와모토 미츠모리(한국명 불명) △마쓰이 히데오(한국명 불명). 이상 16명.
우리 할머니는 올해, 90세의 일기로 밤하늘의 작은 별이 되셨다. 할머니가 생전에 사셨던 집에는 대박슈퍼가 생겼다. 나무 정자에는 강철로 만든 태양광 패널이 설치됐다. 이제는 그곳에서 반딧불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명절이면 그곳을 지나간다. 그럴 때마다 초등학생 때 본 반딧불이는 기억의 시냅스를 자극하곤 했다. 지금은 보금자리를 옮겼는지 더 이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반딧불이. 어쩌면, 내가 초등학생 때 봤던 그 반딧불이는 아리랑을 부른 조선의 반딧불이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