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는 한마디로 ‘멋진 신세계’라는 미래의 유토피아의 모습을 담고 있으나 이 유토피아의 실현을 디스토피아적으로 풍자하여 보여주고 있다. ‘멋진’이라고 하는 긍정적인 형용사를 가지고 있지만, 부정적인 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여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오 멋진 신세계여.”
저자는 미래의 문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또는 미래에 다가올 기계문명을 경고하기 위해 소설을 썼을 것이다. 핵심적인 부분은 ‘멋진 신세계’는 계급사회이며 이러한 점에 대하여 이미 세뇌 교육을 통해 문명인들은 의문과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를 보급하고, 자발적으로 복용하여 개개인의 무의식 세계까지 장악하여 완벽히 인류를 통제한다는 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이라는 것을 그저 하나의 물질로 받아들인다는 점,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이는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배양되게 되고 ‘만인은 만인의 소유’ 라는 말을 따라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긴다는 점이다.
내가 만약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들이 가득하다. 지배계급은 세계의 안정화를 위해, 공동체적인 삶을 위해, 개개인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이러한 유토피아인 ‘멋진 신세계’를 건설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저 그들의 행위를 대변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이 된다. ‘멋진 신세계’는 소수 지배계급의 안위와 그들의 쾌락 추구를 위해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계급을 통한 차별로 인하여 수많은 시민혁명과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나아간 미래에서조차 계급사회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들은 태어나는 과정에서조차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아이를 생산하며 제품의 종류를 가르듯 계급으로 분리를 하여 어릴 적부터 자신의 계급에 만족과 행복을 느끼기 위한 수천 수만 번의 세뇌 교육을 진행한다. 또한 ‘소마’라는 신경안정제를 끊임없이 보급하여 인간을 우민화시키고 무의식의 세계까지 침범하여 인간의 겉부터 속에 이르기까지 통제를 하며 자유를 빼았는다. 책 속에서는 작가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긍정적이고 고통을 해소해주는 경험이 다반사로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 작가의 말을 들어보게 되면 소마에 대해서 “환상이란 천국인 동시에 지옥일지도 모른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니 우리는 소마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신세계에서는 이러한 계급주의적인 삶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신세계 사람도 등장하고 있다. 그는 ‘버나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가진 알파로 상위 계급에 속해있지만 왜소한 체격과 볼품없는 외모를 지녔다. 그는 신세계의 체제를 비난하며 벗어나길 원했다. 그러던 중 버나드는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린다와 그의 아들인 존을 데려오게 되는데 그로 인해 평소 버나드를 무시하던 신세계 사람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자 버나드는 평소 자신이 그렇게도 비난하던 신세계의 지배계급과 체제에 완전히 타협하여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체제를 비판하는 모순된 점은 버리지 않는다. 책에서는 그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판한다는 행위 자체가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드높였으며, 그로 하여금 훨씬 큰 인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버나드라는 인간의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이 문제를 바라보며 지배계급과 체제에 대해 비난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러한 나의 모습도 버나드의 이중적인 모습처럼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 야만인인 존은 신세계에 오게 되어 신세계의 반인륜적인 행태를 보며 심한 이질감과 역겨움을 느낀다. 이 부분은 이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존은 자유와 사랑과 인간성을 잃어버린 신세계에서 이러한 말을 한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그렇다. 인간에겐 불행해질 권리가 있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와 감정까지 통제해버린 신세계를 보며 존이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지는 경험해 본 적은 없으나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멋진 신세계’는 저자가 1930년대로부터 약 600년 뒤를 생각하고 적어 내려간 소설이라고 한다. 오래된 소설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훗날 현실로 다가올 법한 점들이 많았다. 우선 인간을 입맛에 맞게 배양하는 점에서 영화에서 본 DNA를 조작하여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인공 수정하는 장면들도 여럿 떠올랐다. 이 책에서 좋았던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듯이 물론 나도 미래의 세계라고 한다면 편리하고 안락한 세상을 상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미래에 다가올 기술의 진보로 인한 사회문제와 그로 인한 비인간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소설의 제목인 ‘멋진 신세계’는 여러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나처럼 ‘멋진 신세계’라는 제목만 보고서 찬란할 것만 같은 미래의 세상을 상상하고 책을 펼친 독자들은 책을 읽어 내려가는 그 과정이 신선한 충격일 것 같다고 느꼈다. 또 야만인으로 등장하는 존의 자살은 이 책으로 하여금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존은 문명인들의 조롱과 괴롭힘, 어머니 린다의 죽음, 사랑과 혼란스러운 감정들, 신세계와의 이질감, 적대감, 등등으로 인해 결국 자살을 택함으로써 책이 마무리되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되었기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더 깊이 있게 전달할 수 있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편리한 것이라면, 미래 기술이라면, 뭐든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채 살아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후 우리 인류가 기술의 발전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또한 과학의 발전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것만은 아니며 한 문제를 바라볼 때 오직 한가지의 관점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여러 관점과 또 여러 측면과 방향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융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오직 과학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도덕의 관점에서, 인간성의 측면에서, 심리적인,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또한 불행이 있다고 해서 불행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내 삶의 불행도 인정하고 타협하여 살아가다 보면 그 불행들도 나중에 돌아보게 된다면 ‘그땐 그랬지’ 하는 추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적인 행복을 추구하여 멋진 신세계와 같은 삶 속에 살게 된다면 그건 그저 인간이 아닌 도구처럼 또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을 받게 되는 세상에 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