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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어떤 세상인가
저자/역자
올더스 헉슬리
출판사명
소담출판사
출판년도
2015-06-12
독서시작일
2023년 08월 21일
독서종료일
2023년 08월 21일
서평작성자
김*형

Contents

막연하게 누군가에게 이 세상의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 일까요?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병, 가난, 전쟁, 걱정 등이 없는 세상’ 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론 가정이 현실이 되었을때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판적인 시선으로 책의 내용을 집필하였다.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통제되어있다. 인간은 모체로부터 태어나지 않고 ‘부화장’에서 인공적으로 수정되고 부화된다. 시험관에서 성공적으로 수정된 난자는 병 속으로 옮겨져 ‘보카노프스키’라는 과정을 거쳐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으로 외모와 계급이 나눠지고 각 계급에 걸 맞는 ‘습성 훈련’ 과정을 거쳐 인간으로 배양된다. 그렇게 배양된 인간은 계급에 따라 하수도 청소부가 되기도 하고, ‘미래의 세계를 장악할 지배층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출산, 노화, 병으로 인한 고통, 전쟁 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촉감 영화, 소마, 자유로운 성관계로 끊임없이 쾌락을 제공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낀다.
태어나기 전부터 계급이 정해진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아무런 불만도 욕심도 없이 살아간다. 열대 지방에서 광부와 철강 근로자로 일하게 될 ‘엡실론’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뜨거운 열기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되었기에,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상태를 가장 편안하게 여긴다. 신분 상승의 욕구도, 상대적 박탈감도, 불안도 없는 ‘안정된 개인의 삶’이 만든 ‘안정된 사회’

하지만 이 모두 인간이 담당하는 일이기에 어김없이 크고 작은 실수는 존재한다. 이는 배양과정에서 실수로 육체적결함을 가진 ‘버나드’와 인간의 실수로 태어나 야만인으로 살게 된 ‘존’이 그 예시이다.
버나드는 이상적인 사회에 의문을 품는 인물이다. 보통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바뀌지 않던 세상을 부숴버리는 것이 보통의 소설이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버나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실패하는 인물이다.
그는 ‘멋진 신세계’에서 알파 플러스 계급이지만 외모 때문에 같은 계급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한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계속 의문과 사랑받고 싶은 강한 열망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의 기회로 신세계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원주민인 ‘존’을 만난다. 버나드는 존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보단 그를 같은 알파 플러스들의 주목을 끄는데 이용한다. 그때부터 그는 급격히 추락한다. 그가 만약 존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각성했다면 주인공은 존이 아니라 버나드가 되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자만심 때문에 혹은 콤플렉스 때문에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비굴하게 구는 소인배가 된다.

그러나 너무도 철저하고 견고하게 짜인 세계 속에서 그런 작은 실수의 결과물들은 외딴 섬에 내다 버리거나, 스스로 파멸하도록 놔두면 그만이다. 기계 문명에서 개인은 너무나 쉽게 버려지고 대체된다. 그 세계에서 ‘개인’은 얼마든지 새로 찍어낼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므로. 섬뜩하고 서글픈 ‘멋진 신세계’가 아닐 수 없다.
작품의 결말은 주인공인 존이 자살함으로 ‘신세계’는 그대로 흘러가는 것으로 끝난다. 헬름홀츠와 버나드는 그대로 살아갈 것이고, 몬드는 계속 통제관으로써 역할을 하면서 ‘신세계’를 지킬 것이다. 작품은 씁쓸한 결말로 끝이 나지만 마지막 부분의 존과 몬드의 대화에서 무언가 변화할 것 같다는 느낌을받았다.
그것은 세상이 철저하게 통제되더라도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은 신세계인가? 미래의 독재란 강압적으로 사람들을 매질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의문이나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책의 초반부를 읽을때만 해도 나의 생각은 모두가 불행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한데 이상적인 유토피아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나의 머리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부터 대가를 통한 행복의 극대화와 같은 평소에 생각치도 않던 것들에 대하여 고뇌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가 없는 쾌락은 속 빈 완두콩이다. 역시 인간은 이별에 아파하며 문학을 통해 표현 할수 없는 벅참을 느껴야 행복하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이미 무서운 수준으로 발전했다.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여성의 몸이 아닌 공장에서 인간을 배양하고 특정 성질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니콜라이 베르다예프의 말처럼,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는 과학기술을 가졌지만, 더 이상 실현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유토피아의 실현을 회피’하는 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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