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잔혹사’, 이 책의 제목이다. 부제를 보지 않고 본 제목만을 본다면 책의 내용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 본다면 ‘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난, 특히나 잔혹했던 사건들을 모아둔 것일까?’ 따위와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현대사의 사건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은 것을 ‘잔혹한 일’로 보고, 그에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여성노동자 시위, 마산 할머니 시위, 학병동맹 사건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는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의 시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첫 정부의 출범, 처음으로 실시한 직접 선거, 국민의 개인 삶이 보장받게 된 순간 등 다양한 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민주주의는 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장담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이다. 국민들이 직접 국가의 지도자와 구성원들을 뽑음으로써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은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는 국가가 어디까지 국민을 위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즉, 국가권력이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해도 되는지는 정해진 경계가 없다는 말이다.
책의 2장에 나왔던 것처럼 박영두라는 개인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보장받지 못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불량배’로 간주되었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사망했다. 박영두와 같이 국가권력에 의해 삼청교육대로 간 사람들은 항변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개인이라는 존재가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수의 국민을 위해 소수의 국민이 국가에 의해 사회에서 삭제되었다. 이를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당시가 군부 세력에 의해 통제되던 때라고 하더라도, 엄연히 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된 이후였다. 하지만 박영두와 같은 개인들은 민주주의를 보장받지 못한 것이다.
7장에서 언급된 소정골 피학살자들은 누구인지, 왜 학살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는 1951년 발행된 『민주신보』에서 군·경찰 합동수사본부가 거제도의 피난민 수용소를 급습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한 불온세력 총 286명을 검거했다는 기사를 통해 체포 시점과 사람의 수를 고려하면 소정골 피학살자들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 사건 또한 군·경찰 합동수사본부, 즉 국가에 의해 ‘불온세력’이 검거된 것이다. 불온세력은 불온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인식하기에 불온했던 것이지 않을까. 이 또한 국가가 ‘국민을 위해’ 소수의 국민을 삭제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건들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일하다가 발생한 사건이다. 민주주의의 사전적 정의와는 일치하지만, 결코 민주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완전한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사회의 여러 요소 등을 고려하면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전시 상황과 같은 국가 긴급 상황이 아니면 국가가 국민들의 ‘개인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없는 것을 완전한 민주주의로 정의하고 싶다. 국민이 정치적 영향, 흐름 때문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의 공약과 행적을 보고 국가 구성원으로 선출하고, 국가의 압박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완전한 민주주의다. 현재도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완전한 민주주의를 향해 걸어가는, 과거와 같은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국민 모두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과거의 이들처럼 국가와 맞춰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