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셔스는
할렘가, 문맹, 반항, 고도비만, 임신한 12살 흑인 여학생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프레셔스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매일 학교에 성실하게 나가면서도 수업 시간에 책 122페이지를 보라는 선생님의 말에는 거칠게 반응한다. 흔히 수업을 듣기 싫어하고 자극적인 놀잇감만 손에 쥐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이다. 아니다. 전혀 아니다. 프레셔스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그녀의 본질을 들여다보자.
\”선생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민망하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겐 모든 페이지가 다 똑같아 보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난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었다.\”
프레셔스는 수업을 사랑했다. 배움을 사랑했고 지식을 얻고 싶었다. 그녀는 교실 소음을 정리하고 수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글자는 읽지 못했어도 수학 선생님은 그녀를 최고의 학생이라 칭했다. 그녀는 친절한 사람들을 좋아했고 깨끗한 옷차림을 좋아했다. 그와 동시에 글자를 읽지 못하는 자신을 싫어했고 뚱뚱한 자신을 싫어했다.
자기방어가 강한 그녀는 자기혐오도 누구보다 강했다.
오물.
프레셔스의 아버지는 그녀를 7살 기저귀를 차던 때부터 강간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딸을 방치했다. 아니. 동조했다. 프레셔스가 어머니에 대해 가진 첫 기억은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이라는 부분에서는 나조차도 내 바로 옆에 오물이 있는 듯한 역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호칭이 아깝게 느껴진다. 갓난아이의 기저귀를 벗겨내 강간을 시도하는 아버지와 바로 옆에서 강간 당하는 딸을 질투하는 어머니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린아이는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안락한 침대에서 포근한 냄새를 맡으며 자람이 마땅한 존재인데. 안타깝게도 프레셔스는 안락한 냄새 대신 오물 냄새를 맡으며 어린아이에서 아이로 성장했다. 12살이라는 어린 아이에 그녀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첫 아이를 차가운 부엌 바닥에서 홀로 외롭게 출산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병원도 갈 수 없었다. 오물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이 오물에서 자랐기에 자신의 특징이 오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피부색이 어두운 흑인이라서, 고도 비만이라서, 예쁘지 않아서, 돈이 없어서, 금발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모습이 아니라 예쁘장한 공주처럼 생겼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공주처럼 소중하게 대했을 것이라 확신하며 자책한다.
친아버지에 의해 2번이나 임신한 16살의 프레셔스가 부디 그녀는 오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책을 읽어나갔다. 어느새 난 그녀의 고통에 스며들어버렸다. 내가 프레셔스의 옆에 있었더라면 그녀를 누구보다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텐데.
아니, 흑진주는 오물이 아니다.
프레셔스는 결국 두 번의 임신으로 인해 중학교를 정학 당한 후 대안학교에 나가며 아이를 키운다. 다행히도 대안 학교에서 프레셔스는 이때까지 없었던 위로와 온기를 얻었다. 친구가 바베큐 맛 감자칩도 사주었고 선생님을 통해 글 쓰는 법, 읽는 법도 배웠다. 상담도 주기적으로 받았으며 사회복지 제도를 통한 지원도 받았다. 일기장을 꾸준히 작성하며 선생님과 글자로 소통했다. 그녀 주변의 모두가 프레셔스가 일기를 주기적으로 작성하며 시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친구의 추천으로 나간 근친성폭력 피해자 모임에서 만난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아이는 프레셔스에게 충격을 주었고 프레셔스가 그녀의 특징으로 인해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그저 프레셔스의 아버지가 그녀의 아버지처럼 추악한 인간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근친피해자 모임에서 프레셔스는 뚜렷한 동질감을 느꼈고 선명한 위로를 받았다.
여전히 가끔은 욱하고 욕설을 뱉지만 프레셔스는 최선을 다해 성장하고 행복해지고 있었다. 대학교에 진학해 좋은 직장에 취업하여 사회의 도움 없이 오롯이 제 힘으로 아이를 부양하는 미래를 계획하고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18살은 계획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한창 놀아도 괜찮은 어린 나이지만 프레셔스는 이미 이때,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였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프레셔스
\” 아버지가 에이즈에 걸려 있었어.\” 라는 말을 엄마에게서 듣기 전까지.
친딸을 강간하고 그 엄마와도 동시에 관계를 맺었으며 혼인 관계인 다른 가정에서도 아버지라고 불렸던 남자는 에이즈에 걸려 있었다.
프레셔스의 HIV검사 반응은 \”양성\”.
글자를 배우고, 두 아이를 키우고, 검정고시를 친 후, 대학입시도 준비하고 싶었던 어린 여학생은 에이즈에 걸렸다.
\”인생이란 나를 때려눕히는 망치일까?\” 프레셔스의 중얼거림에서 그녀의 고통이 느껴졌다. 태어났을 때부터 폭력과 악취에 감싸여 성장했지만 치열한 반항과 노력의 끝에 겨우 마주한 결말이 에이즈라니. 시한부 인생이라니. 너무 가혹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프레셔스는 아직 성인도 아니다. 이 모든 일이 18년동안 한 아이에게 벌어진 일이라는 게 구역감이 든다.
다행히도 프레셔스의 막내 아들 압둘은 음성이 나왔는데, 프레셔스가 \”세상에는 신이 계시는 거야\”라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태어남과 동시에 거의 18년동안 가족에게 강간 당하고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왔는데 그저 아들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그녀는 신이 계심을 실감한다. 과연 나였다면 어땠을까. 한평생을 가족의 보호하에 안락하게 살아온 나는 신이 계심을 실감하지 못 했다. 하지만 프레셔스는 100가지 불행 중 하나의 기적으로 신이 계심을 실감하다니. 내가 너무 안락하게 살아온 탓인지 프레셔스에게 기쁜 일이 그만큼 없었던 탓인지 고민하게 된다. 과연 어느쪽이 정답일까?
일년, 오년, 어쩌면 10년 예정된 죽음을 마주하고 프레셔스가 \”갈색의 햇살\”, \”나의 눈부신 갈색 아기\” 압둘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서글픈 장면을 끝으로 결말이 난다.
안녕
열린 결말이기에 프레셔스가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최대한 행복을 느끼며 인생을 즐기다가 갔기를 바란다.
프레셔스가 폭력에 노출되지만 않았더라도 , 첫째 아이에서 누군가 신고만 했더라도 그녀의 인생이 이토록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 보호막의 부재와 이웃의 무관심, 무책임, 공권력의 빈틈이 결국 한 아이의 인생을 처음부터 어긋나게 만들었다. 예로부터 한 아이를 키우는 것에는 한 동네가 함께 나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이는 보호받고 배려 안에서 성장하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사회는 노키즈존, 애새끼처럼 아이혐오 단어가 생겨나고 아이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도 증가하고 순수한 아이는 추악한 어른의 성범죄 표적이 된다. 아이들은 놀이터가 아닌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며 함께 놀고 유해한 정보를 쉽게 흡수한다. 주변의 영향을 빠르게 받는 아이를 대상으로 각종 매체에서 혐오 단어에 가볍게 노출 시키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
부끄럽게도 이제서야 의문이 들었다.
아이는 욕설, 혐오, 학대, 배척이라는 단어와 엮일 일 없이 오롯이 주변의 관심 안에서 사랑 받으며 성장함이 당연하지 않는가. 프레셔스와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일단 나부터 조금 더 아이를 배려하고, 폭력에 노출 된 아이가 주변에 있는지 신경쓰는 올바른 어른이 되어 보겠노라 반성해본다. 프레셔스가 그토록 원했던 깨끗한 옷, 어른의 보실핌, 적당한 음식, 질 좋은 교육, 폭력 없는 환경이 모든 아이들에게 당연한 일이 되도록 이젠 어른들이 전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을 오물이라고 여기는 아이가 발생하지 않도록.
성장하는 아이는 모두가 프레셔스처럼 소중한 보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