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2년 발표된 SF소설로서, 약 600년 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을 ‘맞춤형 생산’하고 극단적으로 통제된 삶을 살도록 행동 조절과 의식을 주입하는 사회를 그려냈다. 신세계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가족의 개념은 없으며, 성적으로 매우 자유롭고 약물인 ‘소마’가 합법화된 세계이다.
세계국에서는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이 설계된 삶을 살도록 ‘맞춤형 생산’된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고 나서까지 도구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정해진 운명이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인들은 정해진 일을 수행하도록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유리병 속에서 살아간다. 이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물과 같다.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 안에서는 그저 사회의 존속을 위한 인간이 아닌 부품 중 하나와 같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린 세계는 정말 \’멋진\’ 신세계인가? 아무리 고도된 발전된 과학기술의 세계라도 인간만의 개성,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즉 인간성을 놓치면 그것은 ‘멋진’ 신세계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멋진\’ 신세계, 즉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는 야만인 사회와 문명사회라는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한다. 주인공인 ‘존’은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하지만 야만인 구역은 고독을 주었고 신세계는 죄의식과 절망을 주었다. 결국 그 어느 곳에서도 완벽한 행복을 찾지 못한 존으로 결국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을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즉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야말로 인간의 이상이 그려낸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긴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p.300)
저자가 이 책과 이 책을 읽는 우리를 비교할 수 있도록 \’야만인\’을 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그저 책을 읽고 있지만, 우리의 삶과 비교하면서 끝없는 발전으로 인간성을 놓치게 된다면 늙을 권리, 불행할 권리, 아플 권리조차 없는 비극적인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경고장을 보여주고, 결국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하는가 라는 최종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최종적으로 이 책은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무언가의 부재, 무언가의 과도로 인한 문제점을 통해서 유토피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