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크게 소승과 대승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론 부처가 수행을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소승, 개인의 수행보다 중생구제에 중점을 둔 것을 대승이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이렇게 나누기 보단 소승이라는 개념이 당시 인도에서 부유해진 승려들이 중생구제보단 각자의 이론 정립과 특정 경지만을 지향했던 태도를 비판하면서 본래 부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당시의 부파불교들을 소승이라고 칭하고 본인들을 대승이라고 칭했다는 흐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면 더욱 좋겠다.
단순히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현실에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통찰해서 우리의 생각이 왜곡되어있다는 것을 알라는 정신을 담은 대승의 대표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는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을 잘 바라보는 것이다. 나아가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여래가 될 만한 덕목을 기르는 것이 아니고 있던 것을 잘 바라보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의 안에 내재된 불성을 잘 바라봐야하는 것이다. 망상이 아닌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통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이러한 고통 중 하나가 \”모습에 대한 관념\”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대상이 관념화되는 과정에 고락의 감정이 일어날 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평정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이러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와 같은 지각적인 측면의 수행을 통해 6바라밀을 수행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2달 전에 여기까지 적었었는데, 이것저것 할 일이 있어서 독후감을 이어서 적지 못 했다. 그렇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솔직히 많은 내용이 기억나지가 않는다. 다시 읽고 독후감을 적는 것이 옳은 길이겠지만 너무 귀찮고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결국엔 무한정 미룰 것 같아서 이거라도 적는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고맙겠다.
개인적으로 많은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불교철학은 정말 다양한 철학에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느낌이다. 부처님의 세계관 나아가 인과율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세상\’과 \’나\’ 라는 존재는 분리 될 수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나라는 존재가 죽는다면 이 세계의 시공간 또한 소멸한다\” 라고 말한 칸트의 철학이 보였고 부처님의 역동적 상호의존적 인과율을 다루는 부분에선 변증법이 생각났다. 그리고 실체론과 체용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언어\”라는 것이 초점을 두는데 유난히 \”비트켄슈타인적이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론 \”인간의 행위의 계기는 욕망, 비합리성 등인데, 우리는 그 행위와 결과만 알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라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상이하다고 느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 틀릴 가능성이 매우 다분함.)
한 가지 책 자체에 아쉬움으로는 이 책의 저자 이중표 교수는 중생 구원에 대한 것을 너무 대승 불교에만 초점을 두는 듯해 보였다. 석가가 있던 초기 불교에서 중생을 나 몰라라 했던 건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불교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내용을 적고 싶은데 이 내용은 지금 읽고 있는 <미래를 직시하며>를 읽고 적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