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에 존재 했던 수많은 왕조들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지배 야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의 역사는 천년동안 진행된 중국의 침입에 대한 항쟁의 역사이다. 본 책은 그 항전의 역사를 베트남 왕조 시기별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천년전쟁』에는 딘 왕조, 레 왕조, 리 왕조 등 다양한 왕조들이 등장한다. 본 서평에서는 13세기 베트남에 들어섰던 쩐 왕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쩐 왕조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류 역사상 최대 제국인 원나라의 침입을 받았음에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쩐 왕조의 역사를 읽다보니 고려와 비교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같은 민족의 공격을 받았다는 점과 항전 과정에서 두 나라의 지배층이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쩐 왕조가 들어설 무렵인 13세기는 ‘푸른 늑대의 후예’라고 불리는 몽골족들의 전성기이다. 당시 몽골 초원에 많은 몽골 부족들이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흩어진 몽골부족을 통합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은 하나가 된 많은 부족들과 함께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몽골족들은 뛰어난 기마 실력과 우수한 활 실력으로 중국본토, 동 유럽일대, 만주 지역 등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 몽고의 깃발을 꽂았다. 이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최대 제국인 원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몽골의 정복 전쟁에도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 바로 고려와 베트남이다. 이 두 나라의 몽골 항쟁의 과정을 간략하게 담아 낼 것이다.
13세기 베트남 에서는 리 왕조 말엽에 정권을 장악한 쩐투도는 왕권을 찬탈하여 자신의 당조카인 쩐까인을 왕위로 내세워 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쩐 왕조를 세웠다. 먼저 쩐투도는 리 씨 왕족을 숙청하고 지방 호족들을 와해시켜나갔다. 그리고 왕 뿐만 아니라 주요 고위 관직에도 쩐 씨 일가를 등용했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쩐 왕조는 각종 행정기관을 설립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도모하기위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또한 농업 발전과 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쩐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을 확보했다.(p.131)
13세기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고려였다. 하지만 고려도 베트남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문신들과 무신들의 차별대우를 이기지 못한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를 우리는 ‘무신 정권’이라고 한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은 최우 이었다. 최우의 집안은 아버지인 최충헌을 시작으로 4대 60년간 왕 위에 군림하여 고려를 지배했다. 쩐 왕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최우를 비롯한 무신들은 국정운영을 원활히 하기위해 많은 행정 기관들을 설립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시대 최고 무신 회의기구인 중방, 최충헌 이래 최고 정치 기관은 교정도감, 최우가 인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정방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나라는 몽골의 침입을 피할 수 없었다. 먼저 고려는 1231년~1273년 약 40여 년 동안 9차례에 걸친 몽골족의 공격에 항전을 하였고, 베트남은 1대 태종에서부터 3대 혜종 까지 총 3차례에 걸쳐 침입을 당하였다. 많은 몽골의 침입 과정을 통해서 두 나라가 지닌 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 볼 수 있다. 몽골의 1차 침입이후, 최고 실권자인 최우는 몽고와의 전쟁을 장기화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강화도로 천도를 한다. 강화로 천도한 이유는 몽골족은 해전에는 약하다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결국 최우는 백성들에게 섬이나 산성으로 숨어 항전하라는 무책임한 명령을 남기고 왕과 조정관료, 자신들의 측근과 함께 강화도로 입조한다.
고려의 강화도 천도 소식이 몽고의 귀에 들어오자, 살리타를 중심으로 하는 몽고의 대군이 다시 고려를 재침공 하여 개경, 남경(한양)을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공략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왕, 조정관료, 기득권 세력들이 아니라 힘없는 민초 들이다. 기득권 세력의 ‘나 몰라라’식 태도에 허탈감을 느낀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고 의병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적인 의병활동의 예로써는 처인성 전투를 들 수 있다.
결국, 총 9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황폐화된 고려는 몽골와의 마지막 강화를 맺었다. 이 강화를 바탕으로 고려는 ‘원 간섭기’라는 비극적인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몽골의 제 3차 베트남 정벌은 1287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쩐 왕조의 수군 지휘관은 쩐카인즈 라는 인물이다. 그는 부도덕한 성품을 지녔고, 탐욕스럽고 온갖 비행을 서슴지 않게 저지르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의 용서하여, 성종은 그에게 장군의 직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오마르가 이끄는 몽골 수군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죽이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성종은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 기회를 얻은 쩐카인즈는 베트남의 지리적인 이점과 전략을 통해 몽골 수군과 군함으로 물자를 운송하던 선박을 격파했다. 수전에서 패함으로써 물자가 끊기고, 우기가 다가오고 지역 풍토병이 몽골군에게 큰 타격을 주자 토곤은 철군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육로는 토곤이, 수로는 오마르가 지휘하여 철수 하였다. 몽골의 철수 소식이 전해지자 쩐꾸옥뚜언은 몽골군에게 복수의 맹세를 하고 바익당강으로 향했다. 그는 철군하는 몽골 수군을 크게 격파 하였다.(p.184~186)
육로 퇴각도 만만치 않았다. 몽골군의 무자비한 약탈에 피해 입은 민초들이 성종과 쩐왕조의 병사들과 함께 육로 철수부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백성을 자애롭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깊은 뿌리와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가질 수 있습니다.”(p.193)
백성 즉, 국민은 억압 받는 대상이 아니라 보호받고 존중 받아야할 대상이다. 쩐 왕조 부분을 읽으면서, 백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민본’이라는 말을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나 다른 나라의 역사들 중 ‘민본’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보기 힘든 사건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건이 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이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탄생하면서 민본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뉴스 나 신문은 국민을 무시하고 기득권 세력의 무책임함이 드러나는 많은 소식들을 전한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가습기의 분무액에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하여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폐질환에 걸린 사건이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일부 사람들에게 ‘제2의 세월호 사건’ 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사건에 대한 사후처리가 미흡했고, 담당자들의 책임 회피 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결국,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 대다수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옥시 대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민본’을 무시한 판결이다. 유독 우리나라는 국민을 우롱한 기업인, 혹은 기득권 세력에게 선고하는 처벌이 미흡하다. 다양한 이유를 대면서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변명을 늘여 놓는다.
본 서평을 통해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 2항의 가치를 깨닫고, 다시는 국민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