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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인 넘어짐
저자/역자
Lareau, Annette
출판사명
에코리브르 2012
출판년도
2012
독서시작일
2020년 12월 18일
독서종료일
2020년 12월 18일
서평작성자
이*영

Contents

불평등과 아이들 간의 관계

십 년 전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보면 명랑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불평등한 이라는 형용사는 어린시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자연적 성취에 기반한 여유로움보다는 집중 양육을 통한 발전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집중 양육을 위한 자원의 양과 질은 계층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아이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결정되는 계층에 따라 집중 양육을 받기도 하고 받지 못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불평등한 어린시절 이라는 제목은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책에서는 상승 지향적 유형 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정기적 소득이 있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부모를 지칭하는 말인데, 나는 여기서 집중 양육을 선호하는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를 느꼈다. 사례들로 미루어 보아 안정적인 소득과 참여 의식은 대개 중산층 부모가 보이는 특징이다. 중산층 부모는 사회적 자산과 그에 따른 사회적 권력을 통해 사회의 분위기를 이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중 양육이 사회적 추세가 된 것은 그들이 집중 양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대로 행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_인종과 성별

사회적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계층 외에도 인종이나 성별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미국 사회에서는 백인보다 흑인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열망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흑인이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어 극적인 계층 상승이 필수적 요소라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알렉산더 윌리엄스와 스테이시 마셜 같은 흑인 중산층 가정의 구성원들은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거기에 대처하는 법을 따로 배워야만 했다. 나는 인종적 차이에 대한 차별이 불평등을 가져온다는 것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알렉산더와 스테이시같은 흑인 중산층 가정과 케이티와 웬디같은 백인 빈곤층 가정을 비교해 보면 전자의 집중 양육도 정도가 훨씬 높았다. 

 

하지만 개릿이나 멜라니같은 백인 중산층 가정을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약 인종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중 양육을 채택한다면 백인인 개릿과 멜라니의 부모가 집중 양육을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의 부모는 성공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했고 자녀를 지원할 만한 경제적 여건도 갖추고 있다. 즉, 중산층으로서 현재 가지고 있는 사회적 자원과 권리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하여 자녀의 교육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와 부정을 통해 인종보다는 계층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에서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성별에 따른 불평등도 분명히 존재한다. 과거 농촌 지역에서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딸이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현재에도 딸보다는 아들을 유학 보내려는 경향이 크게 나타난다. 백인 빈곤층 가정의 웬디는 여성으로서 우아함 을 체득하기 위해 춤을 배웠고 다른 남자 형제처럼 길거리에서 뛰어 놀지도 못했다. 이는 중산층의 아이들이 성별에 얽매이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별 구분과 차별의 정도가 중산층보다는 빈곤층에서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성별에 따른 불평등도 계층의 불평등 안에 포함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자녀 교육에서 부모의 젠더적 역할 차이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녀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여성이다. 자녀의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요소가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이라는 우스갯소리에도 성별에 따른 젠더적 역할의 차이가 적용되어 있다. 모든 계층에서 여성이 자녀의 교육에 많이 참여하지만 중산층일수록 성별에 따른 역할의 분리 정도가 약해진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중산층의 아이들이 성별에 따라 과외 활동을 구별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부부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나는 성차에 따른 차별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중산층에 의해서 변화하고 있는 사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산층은 집중 양육 방식을 지배적 교육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즉, 교육 면에서 실질적인 사회 조정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양육을 위해서는 아버지 역할 이 중요한 요소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듯 집중 양육 방식을 채택하는 가정에서는 자녀의 양육에 참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역할 분리의 모호성과 아버지의 양육 필요성은 모두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따르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대두되었다.

 

집중 양육의 역설적 특징

앞서 언급했듯이 상승 지향적 유형은 있어도 하강 지향적 유형은 없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용어의 등장이 우리 사회의 경쟁 심화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정과 학교에서 차별화되려고 한다. 하지만 차별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난다. 

 

집중 양육을 받은 아이들은 대개 성공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집중 양육의 결과가 가져온 긍정적인 면만 생각해야 할까? 책에서 다룬 아이들은 대학 입시와는 먼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 하지만 아이가 입시나 취업을 준비할 만한 나이가 되면 부모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경쟁 속에 뛰어든다. 점차 과열되는 경쟁 속에서 집중 양육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중산층 부모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좀먹는 역설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집중 양육의 폐해가 나타난 사건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공부를 강요하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시체를 방치한 고등학생의 예이다. 이 어머니는 강요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폭력은 자신의 희생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는 교사들이 기여하는 바도 크다. 교사들은 부모에게 두 가지 대비되는 태도를 보이기를 바란다. 하나는 교사에게 협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의 교육에 참여하는 것이다. 전자는 노동자/빈곤층 부모, 후자는 중산층 부모의 태도와 결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한 교사들의 요구가 과도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빈곤층 부모가 교육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들이 충분한 교육적 지식을 갖추지 못해 자녀 교육이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산층 부모는 충분한 교육적 지식과 경제적 여건을 가졌다. 즉,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을 경우 언제라도 자녀의 교육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부모에게서 서로 다른 계층의 특징을 발견하고자 하는 교사의 바람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백인, 중산층, 남성, 개릿 탈링거의 사례

개릿은 바쁜 자신의 삶에 전반적으로 만족하고 있다. 집중 양육의 산물인 스포츠 활동의 성과도 좋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개릿의 집중 양육은 성공한 것일까?

 

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집중 양육의 이면에 있는 문제들을 꼬집어 볼 것이다.

 

첫째, 개릿의 만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개릿은 과외 활동을 통해서 즐거워했고, 특히 축구의 경우 큰 애정을 보였다. 하지만 개릿은 자신의 일상에서 자율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해 보기는커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모의 권유를 통해 적성에 맞는 일을 바로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활동에 대한 애정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일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둘째, 개릿은 현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개릿은 백인 중산층 남성으로 앞서 언급했던 인종, 계층, 성별이라는 세 가지 불평등 야기 요소에서 벗어나 있다. 즉, 불평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릿은 자신보다 계층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이러한 개릿의 모습은 집중 양육이 과열되는 현 상황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셋째, 가족 사이의 유대감이 낮으며 집중 양육의 대상이 한 아이에게만 국한되었다. 개릿은 가끔 갑자기 숨을 참는 이상 행동을 했지만 가족 중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개릿의 부모는 개릿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아이를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집중 양육을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컸다.

 

형제에게 개릿은 일상적 자유를 앗아가는 미움의 대상으로서 작용했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생겨난다. 하지만 개릿의 동생들이 하는 대화를 살펴보면 형제 간 적대적 관계가 도를 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을 힘껏 쳐라 와 공을 개릿 형의 머리라고 생각해라 라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통할 수 있을까? 이 말의 이면에는 형의 집중 양육을 위해 희생된 동생들의 불만이 녹아 있다.

 

형제 사이를 악화시킨 건 부모의 잘못된 처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아이에게 자신의 자원을 집중시킬 생각이 있었다면 나머지 두 아이에 대한 계획 또한 같이 마련했어야 했다. 예컨대, 개릿의 축구 연습을 보러 갈 것이라면 스펜서와 샘을 축구장에 데려갈 것이 아니라 잠시 돌봄 기관에 맡기는 등의 대안을 준비했어야 했다는 뜻이다. 형의 일정을 위해 동생들의 일정을 희생시키고 나아가 형제 사이를 악화시키는 것은 집중 양육의 긍정적 기대효과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백인, 빈곤층, 여성, 케이티 브린들의 사례

개릿의 부모와 달리 케이티의 부모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교육을 위한 경제적 여유도 없다. 이러한 차이는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인가? 라는 질문의 답에서도 다른 답을 내놓게 한다. 즉, 노동자/빈곤층 부모는 과외 활동이 자녀의 성장에 핵심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뿐더러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집중 양육 방식을 채택하고 싶지 않아 한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 원초적으로는 노동자/빈곤층에게 할당된 사회적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생계 부양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니 하층 계급에서의 부모됨은 의식주 해결에 국한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자원의 차이가 경험의 차이 로 이어지며 계층을 나누는 핵심적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 중산층은 가부장적 성 역할의 분리를 지양하고 있다. 이는 보다 효과적인 집중 양육을 위해서라면 부모 모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다. 즉, 중산층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연스레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된다.

 

계층을 나누는 차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주목한 것은 계층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 해결 태도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중산층의 부모는 아이에게 문제 해결을 유도하지만 빈곤층의 부모는 직접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런 상황에서 전자의 아이들은 문제를 유추하고 해결하려는 주체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기에 중산층의 아이들은 훗날 사회적으로 선택 받아 집중 양육의 효과를 거둘 가능성이 커진다.

 

케이티의 엄마는 푸드 스탬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고, 푸드 스탬프 개수를 덜 받은 일에 대해서 분개한다. 케이티의 사례에서 푸드 스탬프로 대변되는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지원 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빈곤층에게 주어지는 1) 사회적 자원의 절대적 양이 부족하고, 2) 지원을 받기까지의 행정적 절차가 복잡하며, 3) 사회적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미국 사회만의 것일까? 근본적인 문제 인 만큼 우리나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1) 은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일어나는 해결 불가능한 일이고 2) 는 구시대적 행정 구조를 개편하면 될 일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3) 사회적 낙인에 대한 것이다. 지난 2008년, 기초생활수급자 여고생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담임 선생은 공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를 일으켜 세우거나 모욕적 언행을 하며 사회적 낙인 찍기 에 앞장섰다고 한다. 사회적 낙인은 빈곤은 무능력한 개인의 산물 이라는 의식이 개선되었을 때 없어지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가장 노력해야 할 교사가 나서서 사회의 필요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은 비판 받아야 할 일이다.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백인 빈곤층 여성인 케이티 대신 흑인 빈곤층 여성의 사례를 조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흑인 빈곤층 여성을 관찰했다면 백인 중산층 남성 개릿과 뚜렷한 비교를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불평등을 초래하는 주 요소에는 크게 인종, 계층, 성별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모든 요소에서 사회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개릿과 반대되는 인물을 조사했다면 개릿을 비롯한 사회 상층 계층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특권 의식을 보다 면밀히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층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 사용법

중산층은 언어를 학습 수단으로 사용한다. 대화를 통해 어휘력, 판단력, 이해력을 기르고 궁극적으로는 학업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러한 결과는 중산층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중산층의 부모는 자녀에게 강압적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언어를 통해 자녀와 협상하고 부득이하게 지시를 내릴 경우 설명을 덧붙여 자녀를 납득시킨다. 이런 부모와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언어 사용법을 체득하게 된다. 알렉산더 윌리엄스가 의사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설명한 것처럼 권리를 찾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상호작용을 통한 언어 능력의 발전은 개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사회적 관계에서 의사소통의 수단은 말과 글, 즉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중산층의 부모가 이런 이면적 측면까지 체계적으로 고려해서 자녀를 양육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산층이라는 계층적 특성에 따른 높은 교육 수준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의 특성을 받아들이고 부모와 자녀 간 위계 질서를 타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빈곤층에게 언어는 기본적 의사소통만 담당한다. 상명하복의 구조는 갈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부모가 양육을 쉽게 여길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갈등이 없다고 해서 명령과 순종의 체계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체계가 구시대적 사회구조에 동조하는 나쁜 행위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른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아이는 일방적으로 듣는 행위로는 중산층에서의 언어적 상호작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 예로 의견을 반복할 뿐 논리적 설명을 하지 못하는 해럴드 맥앨리스터의 예를 들 수 있다. 정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이 그저 자신의 의견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떼쓰기에 불과하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도 언어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기에 알맞은 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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