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은 ‘상계동’과 함께 한 동네 이름으로는 국내 사회과학 논문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철거, 도시재개발, 주거실태 등의 연관어들을 보면, 그 이유가 ‘빈곤’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경기도였던 사당동은 충무로, 명동을 비롯한 서울 시내 ‘불량주거지’ 철거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1965년 서울로 편입됐다. 그러나 이곳에 가난한 삶터를 꾸렸던 이들은 1980년대 중반에 다시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민이 되어야 했다.
사회학자 조은 동국대 교수는 1986년에 철거⋅재개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려고 사당동에 들어왔다가 정금선 할머니 가족을 만났다. 이북에서 내려온 정금선 할머니는 중구 양동에서 살다가 쫓겨난 철거민으로 사당동에 정착한 1세대 주민이었다. 조 교수는 정금선 할머니와 아들 이수일 씨, 당시 어린아이였던 손자 영주, 덕주씨와 손녀 은주씨로 구성된 이 가족이 도시 빈민의 ‘유형적 사례’라고 생각했다. 철거를 앞둔 할머니네 가족이 상계동 임대아파트로 옮겨가자 꾸준히 그들을 만나며 추적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일곱 살이던 막내손자 덕주씨는 올해 서른세 살이 됐고, 조 교수는 정년을 맞았다. <사당동 더하기 25-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은 지난 25년 동아 꾸준히 만났던 이 가족에 대한 기록이자 연구자 자신과 사회학 연구에 대한 성찰적 기록이기도 하다. 현장 연구 조교들의 일지와 수 많은 메모와 인터뷰, 녹취, 영상 등 25년 동아 쌓인 기록들이 책의 바탕이 됐다. 그리고 이는 <사당동 더하기 22>라는 영상물로도 만들어졌다.
4대에 걸친 정금선 할머니 가족의 이야기는 ‘가난의 대물림’을 재확인 시켜준다. 임대 아파트로 옮겨간 가족은 또 다른 빈곤 지역 상계동에서 여전히 가난을 이고 살아간다. 필리핀에서 온 아내를 맞이한 영주씨는 태권도 사범, 보일러 수리, 막일 등을 거쳐 지금은 미화원을 꿈꾸고 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은주 씨는 아이 셋의 엄마로 고정 일자리가 없어 빚에 시달린다. 감방에도 다녀온 덕주 씨는 우연히 얻은 ‘스포츠 토토’ 당첨금을 종잣돈 삼아 헬스클럽 운영에 도전했지만,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가난한 한 가족에 대한 추적 보고서에 머물지 않는다. 할머니 가족뿐만 아니라 연구자, 연구 조교 등 모두 연구 대상이다. 조 교수는 할머니 가족이 무탈하길 바라면서도 극적인 사건이 왜 생기지 않을까 고민하는 이율배반에 스스로 놀란다. 객관적 관찰과 개입 사이에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대체로 중산층인 연구자들과 연구 대상인 빈곤층 가족 사이에는 너무도 다른 계급⋅젠더 의식의 차이가 상존한다. 조 교수는 “한나절 현장연구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치 두 세계를 경험하는 듯했다.”고 떠올렸다. 길가에 있는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고, 두 세 평짜리 방 한 칸에 서너 명 이상 거주했다. 밀착연구를 하러 방을 얻어 혼자 살던 조교는 심지어 ‘부자’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질감을 극복하면서 현장연구를 했다. 아들과 손자 세 명까지 3대가 함께 살던 금선 할머니 가족을 비롯해 22가구가 대상이었다. 집을 만들고 얻는 방법, 전기를 끌어 쓰는 방식이나 친밀감 형성 과정 등을 생생하게 바라봤다. 2년 6개월간 연구를 끝내고 보고서를 인쇄소에 넘긴 날, 이 지역은 ‘재개발 철거반의 주민 폭행’ 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신문에 보도됐다. 과연 이런 식으로 재개발이 되고 주거가 안정되면 빈곤이 해소될까 하는 의문이 조 교수를 뒤따랐다.
교수가 80년대 중반 서울 사당동에서 만나 금선 할머니 가족 3대는 결국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흔히 던지는 질문이 있다. 게을러서, 낭비가 심해서, 술로 세월을 보내 그런 게 된 것이 아니겠냐고?. 이러한 편견을 일러 ‘빈곤문화’라고 한다.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빈곤문화의 속성으로 50여 가지가 제시되는데, 대표적으로 “폭력, 역사의식의 결여,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 낮은 동기부여, 약한 직업윤리, 혼전 동거, 성 문란, 도박 등”이 있다. 교수는 금선 할머니 가족을 25년에 걸쳐 관찰, 연구한 결과를 근거로 빈곤문화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할머니의 경우,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해졌고, 열심히 산 인물인지라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릴 수 없다. 물론 아들 대부터는 빈곤문화 현상이 보이는데 정밀조사로 원인이 아닌 결과라 밝혀낸다. 한마디로 이들 가족이 가난했던 이유는 “임금이 너무 낮았거나 경기가 불안정해서”였다. 빈곤과 가난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전과할 수 없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빈곤을 가장 가까이서 느낀 순간은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무료급식이 보급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급식 비를 내었는지 내지 않았는지 반 아이들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리고 생활보조금 신청을 선생님을 통해 직접 했기 때문에 한 반에 누가 가장 못 사는 아이인지 낙인이 찍혔었다. 내 기억 속에 가장 못 살았던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할머니 혼자 폐지를 주우면서 남매를 키우셨다. 선생님은 점심 배식이 끝나고 남은 음식은 흰 봉투에 싸서 그 아이에게 챙겨주셨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학교 자체 프로그램 중에 빈곤가정의 학생들을 다른 학생들이 도와주는 활동이 있었다. 그래서 나의 부모님과 친구 부모님들이 그 남학생 집을 방문해서 도와주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빈곤이 세습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교육환경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KBS에서 방영되는 ‘동행’ 등 TV 매체에 나오는 빈곤가정은 기본적으로 보호자의 불안정한 경제적 수입 때문에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대부분은 정규직이 아닌 일용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때문에 저축을 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 부모들은 하루 종일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방치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산층의 일반가정의 아이에 비해 교육의 기회, 질적 향상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게 되면 계층간의 차이가 더욱 극대화 될 것이고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 취업시장에서 우위를 점령하지 못할 것이고 하층계급의 삶이 더욱 공고화 될 것이다. 요즘같이 청년실업이 극심한 시대에 대학교를 나와도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런데 집안, 학벌도 좋지 않은 빈곤가정의 아이들이 어떻게 위세대의 빈곤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을까. 단순 후원과 복지는 금이 간 장독대에 테이프로 임시 처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월이 갈수록 물은 세어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단순한 한국 빈곤가정만을 기술하는 책이 아니라 한국 근대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도시빈민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빈곤을 겪어 보지 않은 사회학자가 연구 대상일 뿐이던 한 빈곤 가족을 4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빈곤을 연구한다는 것에 의미를 지니는 기술지 이다. 이 책은 빈곤을 경험하지 못한 풍요로운 세대의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에게 ‘도시빈민’ ‘불량 주거지’ ‘철거 재개발’ ‘달동네’라는 사회 현실에 대한 실체를 전달하기 위해 알맞은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우리 주위의 도시 빈민층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밀려나게 되었다. 한 동네가 재개발이 되면 그 곳에 생기는 높은 건물들만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뿐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가정이 위기에 놓이며 가난에 허덕이는 모습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밖에 알 곳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재개발과 철거, 또 그로 인해 밀려나는 도시 빈민층의 대물림 현실은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 가난함을 이해하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책에서, 텔레비전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 옆을 지나갔던 사람, 내 지인, 내 친구 등 가난에 대해 말은 하지 않지만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 사실은 나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근래에 본 사회부 기사에서 정부에서 나누어주는 무료 식권을 가지고 어떤 아이가 지정된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것에 불만을 품은 가게 사장이 항의를 했었던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네이버 페이지에서 무료 식권이 있는 아이가 눈치를 보면서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어야 되는 현실이 반영된 광고를 보았다. 빈곤 조차 서러운데 정부의 보조금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시대이다. 이 책에도 비슷한 일화가 나온다. 저소득층 아파트 주민들이 배달 음식을 많이 먹거나 정부가 지원하는 하루 7000원의 점심 값으로 주변 식당을 이용하는 것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하지만 상당수 빈곤층 가정은 엄마가 가출했거나 일을 나가야 해 아이들의 밥을 차려줄 수 없기 때문에 배달 음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만 이해한다. 각자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은 단지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삶의 형식이 된다. 제대로 교육하지도 못 할 거면서 아이만 많이 낳느냐는 말을 하긴 쉽지만, 피임에 대해 교육받은 적 없는 사람에게, 유산할 돈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또 아이를 낳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가난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25년간의 연구는 저자에게도 큰 영향을 주는데 정부 보고서에 적힌 ‘불법 명의 자동차 발생 메커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보았을 때 와 닿지 않던 뜻이 이젠 이해된다고 고백하였다. 가진 게 몸밖에 없는 궁한 사람들이 쉽게 대포폰과 대포차 주인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불량소년’이라고 부르는 가난한 청소년 상당수가 특별히 불량하지도 악덕 하지도 않은 아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는다.
빈곤이 재생산되는 과정과 가난의 구조를 그들 삶을 통해 이해해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가능해진다. 가난의 구조를 이해하면 우리 사회가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책의 첫 장이 ‘밑으로부터의 사회학’이라는 건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