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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악은 없다
저자/역자
아렌트, 한나,
출판사명
한길사 2006
출판년도
2006
독서시작일
2020년 12월 16일
독서종료일
2020년 12월 16일
서평작성자
정*진

Contents

이 책을 읽고 들었던 두 가지의 생각을 나눠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말의 힘, 두 번째는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말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치가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언어규칙을 만들었던것, 예컨대 학살은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으로, 유대인의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등으로 불렀던 것에 대해 이런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의 효과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 것이다. 자신들이 하고있는 행위가 얼마나 추악하고 부끄러운일인지 깨닫지 못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보고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무거운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책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이 부분을 읽고 최근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사람의 탈을 쓴 악마’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인터넷에서 소소한 논쟁이 일어났던게 생각났다. 범죄자들에게 악마라고 이름붙이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악마라고 하면 무언가 있어보이고 자기가 정말 사악하고 광기에 물든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범죄자들의 의도대로 그들을 보는 거라고 그들은 그저 찌질한 루저 새끼들이라고 하는 덧글을 보았다. 실제로 어떤 범죄자가 경찰서를 나서며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하다고 한 걸 떠올려보면, 이것 또한 말의 힘중에 하나인 것 같다. 악마 사이코패스와 찌질한 루저. 이 두개의 말의 느낌은 무게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같은 맥락으로 작년에 방영된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에서 연쇄살인범 ‘까불이’를 그려낸 방식이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마지막화쯤에 까불이의 정체가 극중 내내 까불이의 위협을 받아온 주인공이 그에게 발길질을 하며 금세 제압되는 장면을 보여주며 까불이를 아주 초라하고 찌질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말의 힘보다는 표현의 힘이라고 보는게 더 맞겠지만, 우리가 연쇄살인범, 범죄자 하면 떠오르는 사악한 이미지와 달리 그저 찌질한 인생 루저로 그를 그려내며 어딘가 묘하게 쿨하고 멋있고 있어보이는게 아니라 그저 쓰레기같은 사람임을 더 강조하는듯한 느낌이라서 연출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말과 표현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만약 나치가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대인 학살, 유대인 이송작업, 가스실등의 단어를 그대로 말했다면 그 밑에서 명령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일말의 양심이 찔리기라도 했을것이다. 하지만 나치는 언어를 암호화시킴으로써 그들의 판단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물론 판단의 무능성을 가진 나치 치하의 사람들에게도 죄가 있다. 근데 나치의 그러한 작업들이 더욱더 그들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힘이란, 표현의 힘이란 참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심을 항상 가져야하는 것 같다. 

 

두 번째로, 한나 아렌트는 계속해서 아이히만의 무능력함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녀가 재판을 참관하고 그의 말을 들을 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와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녀의 말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아직도 나치가 건 현실에 대한 마비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이다. 나도 책을 보면서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섬세하고 잔인한 일을 아무 생각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치의 이름으로 그가 수행한 일들이 과연 명령을 이행하기만 한 무능력함으로 설명되는 것인가? 정말 어떠한 악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나? 

 독서를 마친 후에 아이히만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칼럼하나를 발견했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는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나치즘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든 신념에 찬 나치가 아니라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며 관료제적 타성과 인습적 관례를 따른 ‘명령수행자’ 내지는 ‘거대한 기계의 한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아렌트과 관찰했던것과는 반대로 나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반유대주의였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료와 자료에 기초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항상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으며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신념에 찬 나치였다. 그는 단순히 유대인 추방과 수송의 전문가로서 ‘책상물림 가해자’만이 아니었고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로 활약하던 빌렘 사센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냈다. 아이히만은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어요. 우리가 1천만 명의 유대인을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고 우리가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얼간이에 불과한 거죠. 난 함께 생각했으며 이상주의자였어요”라고 고백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재판도 유대주의에 대한 마지막 투쟁으로 간주했다. 아이히만의 상관이던 하인리히 뮐러는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말로 아이히만의 ‘실체’를 요약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가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아이히만이 평범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지배는 항상 집단적 실천을 전제하고 폭력은 항상 구체적 가해자를 필요로 한다. 그 실천과 가해 행위는 대개 명령과 지시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 점차 자신의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 관료제나 위로부터의 명령을 초월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행위자들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이루어진다” 라는 말이었다. 맞다. 전체주의라는 이름 아래 있었지만 결국 나치가 벌인, 아이히만이 벌인 그 섬세한 폭력은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확히 인지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 같다. 이 칼럼을 통해 폭력이라는 행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 

책에는 나치의 편이었다가 나중에 사형된 아우투르 그라이저와 오토 브라트피슈 박사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그들은 법정에서 항상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반대를 했다”고 말했다. 범죄들을 수행한 것은 공적인 영혼뿐이고 그들의 사적인 영혼은 항상 그 범죄에 반대했다는 논리를 펼쳤다. 내면적으로 반대를 했지만 자신들의 안위때문에 겉으로는 나치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 그들의 눈밖에 나지 않고 싶었다는 것인가? 그 알리바이의 결과가 5만명의 죽음이었다. 내적으로 반대했다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만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행위부터가 모순이고, 만약 그들의 사적인 영혼이 정말로 반대를 했다면, 그들은 전쟁이 끝나고 법정에 나오기 전에 이미 그 죄책감에 사무쳐있어야 했다. 그리고 어떠한 변명도 하지 말아야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아는 양심있는 영혼이었다면 죄를 기꺼이 인정하고 벌을 받았을테니까. 하지만 그들의 사적인 영혼에 대한 주장은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변명에 불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변명은 이기적이고 또 잔인하다. 철저히 그들만을 위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양심이 결여된 사람들의 말에 많이 분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책이 인문학의 정수라고 불리우는지 알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말들을 흘려보내고 또 수많은 폭력들을 스쳐지나간다. 우리가 겪은 일이든, 겪지 않은 일이든 조금 더 경계심을 갖고 예민하게 있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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