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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세계로의 비행
저자/역자
정세랑,
출판사명
민음사 2015
출판년도
2015
독서시작일
2020년 11월 15일
독서종료일
2020년 11월 15일
서평작성자
서*윤

Contents

어딘가 특출나게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히어로가 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특출나게 재미없는 세상의 경계를 깨고 들어온 히어로의 공동 주연이 되어본 경험은? 

  안은영은 타의도, 자의도 어울리지 않는 ‘그냥’ 히어로다. 누가 하라고 등 떠민 적은 없지만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사는. 젤리는 그냥 보이는 김에 터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젤리가 이끄는 이 무시무시한 세상을 처리해 줄 사람이 없다. 은영은 대충 이런 책임감 덕에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아도 그냥 한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그녀는 전문 장비를 갖추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그것들을 처치하기 위해, 땅에 한 번 떨구면 부서질 것 같은 플라스틱 장난감 총과 몇 번 휘두르면 건전지 닳아 고장 날 것 같은 LED 봉을 챙겨 다닌다. 은영에게는 참 석연치 않을 수가 없다. 젤리 청소 업체가 있었다면 적성에도 안 맞는 보건 교사 같은 거 당장 때려치웠겠지만, 애초에 그런 게 있었다면 굳이 이러고 살았을까? 귀신을 본다면 무당이든 점집이든 나름의 취업할 구석이 보이지만 목적어가 젤리로 바뀌는 순간, 결론은 유감스러워진다.

  안은영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은 참 많다. 피곤함에 찌들어 하루를 겨우 견디면서도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결국은 해내러 가는 것. 불평불만 하면서도 다음 챕터에 돌입하는 것이다. 안은영과 나의 차이점이라 하면 바로 이런 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을 앞두고 불평불만만 해서는 안 된다. 실컷 양치하자는 계획을 세워놓고 침대에 누워버리면 결국 날 맞이하는 건 다음 날 이상하리만치 상쾌한 볕 드는 아침이듯이. 계획은 실천과 이어질 때 비로소 빛나는 것이지, 거창하게 세워둔 계획만으로는 절대 다음 챕터로 넘어갈 수 없다. 흐린 눈을 하고서 방석을 훔쳐 온 아이들을 구해내고, 옴잡이의 인생을 구해내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홍인표의 인생도 구해내고… 은영은 자신의 투두리스트를 쳐내가는 것뿐이지만 의도치 않은 순간마다 그녀가 구해내는 무언가들이 쌓인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한문 교사 홍인표의 자리를 꿰차고 싶다는 생각. 젤리를 물리치는 히어로에게 보조배터리가 되어줄 수 있는 평범한 존재라니. 정말 탐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은영에게서 젤리를 빼면 뭣 하나 특별한 구석이 없는 그저 평범한 보건교사가 되지만, 그럼에도 은영의 세계는 특별하지 않은가? 출근, 퇴근, 집, 출근, 퇴근, 집…을 반복하는 이 세계 직장인들에게 은영의 존재와 출현은 곧 제2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한겨울의 프롬 파티처럼 꿈 같은 장면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삶은 어떨까. 다음 장면이 예상조차 되지 않는 장르의 등장인물이 되는 것은? 격식만 차린 평범함보단 막장 드라마의 전개가 신선하지 않은가? 은영이 물리치고 잡아내는 게 설령 괴물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뭐 어떠한가! 젤리를 쳐내는 순간에도 그런 그녀에게 반하는 사람이 있는데. 은영의 기묘한 매력은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꿋꿋이 제 할 일을 하는 데서 온다. 그런 그녀의 세계와 닮고 싶어진다면 당신은 안은영이 될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젤리 같은 거 못 보는데요?” 그렇지만 이 세상엔, 젤리보다 훨씬 낯설고 새로운 것들이 넘친다. 우리만이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 직진이 아닐까. 젤리 같은 거 못 보면 뭐 어떤가. 안은영은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갈 힘이 우리에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은영을 그저 소설 속 인물로서 ‘그래, 이렇게 살면 참 피곤하고 좋겠다.’ 생각만 한 채로 흘려보내거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 어느 한 군데에서, 누군가의 안은영이 되어주기란 어렵게 보여도 의외로 간단하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4인조로 짜인 영상 제작 팀플에서, 영상 편집을 할 수 있는 조원이 아무도 없지만 난 프리미어 어언 5년 차라고 가정한다면 그 시점부터 나는 제2의 안은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할 수 없고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어렴풋이라도 해내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속으로는 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 눕고 싶다, 때려치우고 싶다며 죽어라 염불을 외워도 겉으로 티 안 나면 그만이다. 설령 조금 티가 나도 편집을 해내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곧 쓰러질 것 같아도 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면 아무 생각 말고 해 보이자는 것. 누군가의 안은영이 되는 아주 쉽고도 빠른 길이다. 안은영과 정세랑의 세계를 동경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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