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다. 1권에서 미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고 간주했는지, 2권부터는 내용이 매우 깊어진다. 미학이라는 학문이 철학과 예술 그 어느 사이일 때, 1권은 그 축이 예술에 가까웠고 2권은 철학에 가까웠다.
1권에서 원시, 고대, 중세, 근대의 예술과 미학을 다루었다면, 2권에서는 세잔 이후의 현대미술과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 다룬다.
현대미술은 세잔이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혼합을 시도하면서 열리게 된다. 대상 자체를 그대로 뚜렷하게 그리면서 눈에 보이는 색깔을 그대로 담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시각의 단편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형체의 파괴가 이루어져 입체파가 탄생했고 색체의 파괴가 이루어져 야수파가 탄생되었다.
이로써 의미 정보를 중시했던 고전예술에서 형체, 색체, 주제의 틀에 벗어난 현대예술이 등장한다. 우리가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 거냐?’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 머릿속의 예술은 고전예술에만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잊지 말자. 현대예술에는 미적 정보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메를로퐁티, 크로체, 하이데거, 웨이츠, 프로이트 등의 관점들이 나온다.
메를로퐁티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그 이전의 상태인 원초적 지각을 추구했던 것은 세잔과 마그리트의 작품과 비교된다. 이율배반적임이 담긴 그림들. 이들은 원초적 지각을 통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얘기했다면 하이데거는 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예술이 역사적 현존재에 대한 결정적 진리가 일어나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헤겔과 달리 하이데거는 알레테리아로서의 진리, 즉 근원적 진리가 예술에서 일어난다고 하면서 예술이 진리를 열어준다고 했다.
인간의 이드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지만 현실에서 그 욕망이 분출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현실에 분출되어 일어난 것이 범죄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분출시켜야 할까? 우리의 에고는 공상을 통해서 이드의 욕망을 분출한다. 그러나 공상만으로 해결이 될까?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나온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이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이 책에선 달리와 마그리트이고.
1권의 에셔와 2권의 마그리트 모두 패러독스와 부조리를 다룬다. 하지만 서로 같은 주제를 말하지만 그 수단은 다르다. 에셔는 인간의 사유논법인 논리, 그 자체를 깨는 것이고 마그리트는 인간의 사유내용인 의미를 깨는 것이다. 즉,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 등과 같은 형식적 체계에 초점을 두고, 마그리트는 철학, 확장하여 실제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초점을 둔다.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2권을 어쨌든 읽었다. 솔직히 한 번만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재독을 해야 할 것 같다.
‘언제쯤 우리는 달리의 그림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3권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