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비노의 ‘우리들의 선조’ 시리즈의 마지막 소설이다. 개인적으론 칼비노의 동화성보다 환상성을 더 좋아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내가 좋아하는 환상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인 아질울포는 신체는 없고 갑옷 자체에 정신이 깃든 환상적인 존재이다. 이름 없이 세상을 떠도는 갑옷에 불과하던 그는 겁탈을 당하려던 공주를 구함으로써 기사가 되었고, 이 때문에 그의 존재, 정신, 의지는 공주의 처녀성이 보증해주는 것이 된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아질울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공주를 만나러 가는 모험을 떠난다. 그리고 이러한 모험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정해진 하인, 젊은 기사, 여기사가 함께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와 존재하지만 본인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하인 구르둘루. 서로 대척점인 이 인물들은 이 소설 속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이다.
존재한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자아는 있지만 육체가 없는 기사 아질울포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아는 없지만 육체가 있는 하인 구르둘루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편적으로 봐서는 육체가 있는 하인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우리는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면 존재하는 자는 누구일까? 인간은 어떤 삶은 선택해야 할까?
앞선 두 극점의 인물들은 기준점이다. 이러한 기준점 사이에는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젊은 기사 랭보, 본인의 존재의 시작점을 찾는 청년 토리스먼드가 존재한다.
젊은 기사 랭보와 토리스먼드는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철학을 빌려 “인간은 피투성으로 태어났지만 기투하는 존재이다.”라는 말로 설명이 된다.
랭보는 인생의 큰 지향점이 없다.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죽이기, 여인에게 구애하기 등 눈 앞에만 보이는 목표만 쫓는 존재이다. 이러한 랭보는 피투성의 존재이다. 태어난 목적, 기능, 가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주어진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것이 모여 그는 존재하고 실존하게 된다.
토리스먼트는 기투하는 존재이다.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찾으려고 하고 그러한 그에겐 한 가지의 큰 목표가 존재한다. 존재의 시작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인물. 토리스먼트는 그렇기에 실존한다.
세상의 사람들은 랭보 같은 사람들과 토리스먼트 같은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랭보들은 자신의 일들을 하나씩 모은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물을 토대로 자신이 누군지 생각한다. 그들은 귀납적으로 본인을 증명한다. 반면에 토리스먼트들은 목적이 뚜렷하고 그러한 자신의 목적을 탐구하면서 자신이 누군지 생각한다. 그들은 연역적으로 본인을 증명한다. 우리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
작가는 기사와 하인을 통해 인간의 기준을, 젊은 두 청년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아직 두 명의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공주 소프로니아와 여기사 브라다만테. 그들은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일까?
그들은 사르트르의 앙가주망(Engagement)에 대해 보여주는 인물이다. 앙가주망은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자기 구속”을 의미한다. 그들은 모두 소설의 말미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미래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본인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 생각이 없는 하인 사이에 인간은 존재한다. 이러한 인간의 범주 사이에서 두 청년들은 각자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두 여인들은 선택이라는 인간이 인간다워 질 수 있는 필요조건을 보여준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과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으로부터 그들의 가치가 나온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