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바틀비와 영화 속 바틀비는 같은 듯 다른 인물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바틀비는 과묵하고 얌전한, 신비주의 인물로서 왠지 모를 연민을 불러일으켰다면 영화 속 바틀비는 솔직하고 리더십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두 인물의 강단 있는 성품은 똑 닮았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외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설 속 필경사 바틀비는 소신껏 할 수 있는 일 외에는 하려고 하지 않았고 특유의 점잖으면서도 강단 있게 행동해나갔다. 영화 억셉티드에서 바틀비는 그 어떤 대학에서도 합격(accepted)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 곳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사실 소설 속 바틀비는 조금 비상식적인 행동을 많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필경사 바틀비 보다는 대학생 바틀비의 행동에 더 공감이 갔다. 영화 속 바틀비와 그의 친구들은 대학으로부터의 거절을 인정하는 대신 그들만의 학교를 만들었다. 그곳에서는 정말로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설계하고 배울 수 있었다.
현재 대학들의 모습은 어떤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학을 위해 진학한다. 그렇게 들어간 고등학교에서는 대학 입학을 위한 시험을 준비하고 대부분은 그 성적에 맞는 대학교로의 진학을 한다. 그렇게 되니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렇듯 하고 싶은 일 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에 떠밀려서 살아왔다. 나 또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토익과 영어회화를 들어야했고 그 외 여러 교양을 필수로 이수해야했다. 우리는 이 체제에 저항하나 없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행동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고 사는 것을 지향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 두 바틀비들을 통해서 본 현실과 이상은 얼마나 다른지, 그로 인해 나는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도 처음부터 저항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는 이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청년답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틀렸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와,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포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교육 체제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교육을 실천하려 한 영화 속 바틀비와, 자신이 가진 기준 외적인 것에는 일체 망설임 없이 거절할 줄 알았던 소설 속 바틀비처럼.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우리들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만을 좇으며 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중국어 공부’이지만 정작 지금은 수강 중인 과목들의 레포트를 쓰고 있는 것처럼. 지금 당장 해야 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바틀비들을 통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대학을 가기 위해 지난 19년을 피땀 흘려 공부했고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대학 이 후의 최종 목적은 좋은 직장을 위해서였다. 태어나서부터 19살까지 끊임없는 감시가 계속되다가 20살이 되면 모든 일을 혼자 정하게끔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 속의 ‘어른’들의 말은 20살 ‘어른이’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했다. 나의 개성, 재능, 특성을 숨긴 채 공부를 해서 들어간 ‘좋은 직장’은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은 직장, 행복한 직장을 얻었다고 해서 억압에 의해 하루하루 버텨내서 취득했던 대학 졸업장은 나의 가장 빛나던 20대 초반과 바꾸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은가?
내일이 반드시 나에게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 우리는 너무도 젊기에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진짜 내 모습을 나타내 줄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두 바틀비를 통해서 ‘정당한 거절’이라는 나의 권리를 되찾고 스스로 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