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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삶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며
저자/역자
김훈,
출판사명
생각의나무 2007
출판년도
2007
독서시작일
2015년 06월 22일
독서종료일
2015년 06월 22일
서평작성자
**

Contents

 지난해 여름 대한민국은 '명량'이라는 영화를 기점으로 '이순신' 열풍이 불었다. 누적 관객수는 약 1760만에 달하며, 이는 대한민국 국민의 1/3이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광화문에도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기에 이순신 장군의 영향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의 노래'는 사실 이나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소설이며, 전쟁 속에서 왜군과 맞서는 그의 심정과 조정에서 받는 은근한 압박에 대한 내적심리가 잘 녹아져있다. 무엇보다도 책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던 점은 이순신의 삶을 나의 삶에 투영해 볼 수 있었던 점이다. 

 이순신의 유년은 가난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숙청을 당하였고, 이에 이순신은 충남 아산으로 주거지를 옮기며 자리를 잡게 된다. 그의 나이 스물 둘 무렵에 처음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스물 여덟에 무과 별과시험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게 된다. 4년 후에는 보격적으로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와 남해 수군기지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현대사회에서 대학생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무엇보다도 취업문제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는 말이 있들이 취업에 있어서 대학생들은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틈도 없이 사회로 나가게 되며 빠른 취업이 성공인 듯이 스펙과 대외활동, 어학연수와 학점에 하루하루를 달려가고 있다. 나 역시도 대학생으로서 취업이 가장 큰 걱정거리이며, 나의 진로에 대해 매일 걱정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순신은 서른 둘에 음으로 자신이 원하던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가 무예를 배운 나이가 스물 둘이라고 햇을 때, 지금으로 가정하면 10년만에 그가 원하던 직장에 취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에서 철수하는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기 직전까지의 그의 삶을 돌아보았을때 이순신의 전투를 앞선 결의와 조선을 지키겠다는 그의 신념은 현대인들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다. 나는 그의 강한 결의와 정신력의 기반이 그가 청춘 시절에서 부터 오랫동안 고민했던 무(武)의 길에 대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집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기둥이 필요하듯, 젋은 시절 길고 단단한 무(武)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면 그가 가진 강한 정신력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미래를 설계함에 있어서 큰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었다. 

 또한 유명한 말이 되어버린 선조에게 보낸 '신(臣)에게는 배가 12척이 남았고, 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라는 이순신의 장계를 통해서 나의 삶을 다시 되돌려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라는 생각을 기점으로 현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기반으로한 불평과 불만은 현상황을 개선하지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악화시킨다. 이순신에게도 왜군의 330척의 배는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울돌목이라는 지형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했고, 위기를 기회로 바꾼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명량대첩'으로 이어졌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은 나의 독단적인 힘만으로 모든 것을 변화 시킬 수 없다. 따라서 현재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 자신이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시킬것인가에 따라서 나의 삶의 방향은 확실히 변화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 조정과 이순신 사이의 갈등문제이다. 왜란 이전 나이 마흔여섯의 이순신은 종육품 직에 임명된 이후, 8개월 뒤에 병마첨절제사라는 종삼품 자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은 이 임명에 반대했고, 결국 이순신은 부임하지 못하였다. 또한 왜란 이후에도 조정에서의 간섭과 시기로 인해 결국, 1597년에는 선조에 의하여 조정으로 압송당하게 되고 고문을 받게된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이순신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하니 어떻게 처리함이 좋을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기로 작정을 하고, 대신들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전과 후 이순신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조정에서의 권력에 대한 시기와 갈등이 그 밑바탕이었다. 약 400년 이상이 지난 지금, 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아직까지도 그 기틀이 유지되는것 처럼 보인다. 부(富) 혹은 권력을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약자는 강자가 가진 부와 명예를 평가절하 하고 깍아내리려는 성격이 강하고, 상대적 강자들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풍조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있다. 우리는 상대적 약자들은 강자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을 바라지만 상대적 강자의 노력과 결실에 대한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상대적 강자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회에 살고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원균이 후임으로 임명된 이후, 칠천량 해전에서의 결과는 조선 전함 3백 척이상이 파괴되고, 삼도수군이 전멸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성공을 위해 했던 노력과 그로 인한 결실을 존중해주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2015년 현재 이순신 장군은 철수하는 적을 맞아 싸우다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하였으나, 그의 정신과 업적은 나와 우리, 현대인의 삶과 함께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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