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아주 간단하지만 심오한 질문으로 이 책은 문을 연다. 내가 나의 생각이 아닌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면? 마치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을 듯한 물음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무언가를 주입시킨다는 것은 심각한 반발을 초래할 말도 안되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식주입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면 위의 물음을 말도 안되는 것으로치부하고 넘길 수 있을까?
우리가 정보를 접하는 공간은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많아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몇몇 곳에 한정되어진다. 인터넷을 하는 모습만 봐도 어느 누가 포털사이트 메인에서 쉽고 간편하게 접할 수 있는 정보를 다양한 사이트와 비교해가며 그것에 대해 분석하겠는가? 인터넷을 활용하는 층은 그나마 정보습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설정할 수 있는 폭이 넓고 상호간의 의사교류가 가능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열려있지만, 인터넷을 활용 못 하는 층은 어떤가? 단순히 TV와 신문, 그리고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보를 접한다. 이런 일방적이고 한정된 범위에서의 정보습득은 편향적인 이해를 낳게 되고 이는 곧 편견을 만들게 된다.
책에서는 이렇게 형성된 편견에 대해 광범위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저자가 일하는 한겨레라는 신문의 사정에대해서 말해본다.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다.(91p) 이와 같이 한겨레와 경향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은 사뭇 부정적이다. 몰상식하거나 지나치게 사회에 비판적이다 라는 식의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를 편견에 사로잡혀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멀리한다. 이로 인해서 다양한 시각으로 사건을 볼 수 있는 시야는 좁아지고 그것은 또 다시 어떤 사건에 대해 편향적인 이해를 낳게 된다. 한겨레나 경향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매체들이 지나친 편견에 사로잡혀서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특정한 사건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놀라서 바로 튀어나오지만, 개구리를 차가운 물에 담가 놓고 천천히 물을 끓이면 뒤늦게 튀어나오기엔 이미 다리가 익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는다고 하다. 우리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은 종래에는 우리를 얽매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당하고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다. 당하기 전에 방지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꾸준한 성찰과 건강한 가치관의 형성 등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