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그 제목때문에 읽고 싶어졌던 책이다. 세계문학 전집 사이에서 두툼한 두 권의 세트로 나뉘어있는 이 책은 서가에서 꺼내보면 피곤해보이는 표정의 남자가 표지에 있다. 아마 영화화된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이 책은 미국 농민들의 아픔을 그린 책이다. 내가 너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있었던 걸까. 그쪽 동네 농민들은 그저 오렌지 따면서 부유하게 둥실둥실 지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국 역시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일자리를 얻고 밀려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들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 마냥, 설 자리를 잃고 도시로 도시로 밀려갔다. 이 소설은 그 시대에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주인공이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지만 고향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자신의 가족 역시 이주를 결심한 이후였다. 가석방 조건이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캘리포니아에는 일자리가 있을 것이란 막역한 기대를 가지고 늙은 트럭에 온 가족이 몸을 싣고 떠나는 거다. 그 여정동안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 여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임금을 후려치는 농장주들에 분노하는 그런 에피소드들에서 작가가 그 시대, 그 사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이 몇 부분 있는데, 첫째는 어머니에 대한 묘사. 둘째, 톰의 가족과 여정을 함께한 목사 케이시 목사의 이야기, 셋째, 톰이 떠나던 날 어머니에게 한 말, 넷째, 마지막 결말부분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그것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족의 요새며, 그 요새는 결코 점령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고통과 두려움을 인정하면 톰 영감과 자식들도 고통과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런 감정을 부정하는 법을 연습해 왔다. 또한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가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족들이 먼저 살폈기 때문에, 어머니는 별로 웃기지 않은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습관을 익혔다. 그러나 즐거움보다 더 좋은 것은 차분함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아야만 가족들이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위대하면서도 하찮아 보이는 가족 내의 그 위치에서 어머니는 깨끗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얻었다. – 8장 153p. 아마 모든 어머니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않을까.
저는 어둠속에서 어디나 있는 존재가 되니까. 저는 사방에 있을 거에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에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에요.
톰이 떠나던 날,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제일 인상깊었던 건 결말 부분인데, 톰의 누이동생은 남편과 결혼하고 함께 캘리포니아로 가지만 그 사이에 남편은 도망치고 임신한 채 혼자 남겨지게 된다. 비가 와서 농장의 집이 넘치고, 어머니와 비를 피하러 들어간 움막에서 사내아이와 아사직전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 장면에서 누이동생은 그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는 채 소설이 끝난다. 아주 힘든 여정을 거쳐왔고, 앞으로도 힘든 고난의 연속일테지만, 그 장면은 희망의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