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오후, 비가 내렸다. 눈물처럼 떨어지는 굵고도 드문 여우비였다. 비는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나도 여러가지 할일들로 인해 책을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했다. 창밖에 어둠이 짙겨 내렸을 즈음엔 펼친 책도 종반부를 향하고 있었다. 이때 여우비는 소나기마냥 촘촘해지고 성난 바람까지 휘감고 있어, 책의 첫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시퍼런 번개가 눈앞을 스쳐가고, 이어 하늘이 깨어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때.
소년이 청년이 되는 혼돈의 시기, 청소년기. 만 20살의 청년인 내가 이 책과 겹쳐져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인간은 나이를 얼마나 먹든 숨이 끊어질 때까지 흔들리고 흔들리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마음은 소년’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언제나 소년일지도 모른다. 이 책과 내가 겹쳐진 것은 그것일 것이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이름붙이고 있지만 이 책은 속에 소년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청소년 문학’일 것이다. 내 안의 소년은, 혼돈은, 카오스와 같이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일반적인 의미의 청소년기에, 청소년은 2차 성징을 겪으며 신’을 자각한다. 천지창조의 6일째에 이 땅에 인간이 만들어졌듯이, 자신의 세계에 ‘나’가 발견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사건이다. 벼락같이 충격적이고 폭풍처럼 강력한, 혼란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비유하자면, 판도라의 상자가 세상에 내려왔듯이 그리고 그 뚜껑이 열렸듯이 혼란은 시작되고, 그 안에는 온갖 것들이 뛰쳐나온다. 성욕, 폭력, 광기, 자살충동…그리고 꿈과 희망, 사랑까지도. 판도라는 재빨리 뚜껑을 닫았지만, 우리는 진정 이 뚜껑을 닫을 수 있을까? 닫힐 수 있는 뚜껑일까?
책 띠지에는 “한바탕 폭풍을 일으킬 전복의 상상력”이라고 쓰여 있지만, 이게 어째서 ‘전복의 상상력’일까. 작가는 사실의 ‘청소년’을 편집이나 미화 없이 솔직하게 적어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띠지의 용도는 대체 뭘까. 표지가 지문에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글자는 눈에 안 들어옴 – 일단 그렇게 사용하고 있기는 하다.) 다른 청소년 소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밤’을 좀 더 비추어주었음을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아. 우리는 이제 밤에 바쳐졌구나. 짓궂은 낮은 우리를 질투하여 속임수로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속지 않으리. …… 사랑의 밤이여. 영원한 진실이여. 그대의 가슴에 나를 안아주오. 이 세계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오…….” 여기에 공감할 수 없다. 동의할 수도 없다. 문득 데미안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데미안』과 많이 닮았다(미즈 장을 사랑하는 성준을 보며 싱클레어가 생각났다). 데미안은 아프락사스를 외치며 세상의 절반을 이루는 밤을 찬양했지만, 세상은 낮과 밤으로 함꼐 이루어져있다. 그것도 저울의 양팔처럼 서로를 팽팽히 긴장시키는 형태가 아닌, 황혼과 새벽으로 ‘이어져’있다. 그들은 ‘하나’다. 우로보르스(자기꼬리를 무는 뱀)처럼. 그래서 그들을 합쳐 ‘하루’라고 부른다.
이 작품 전체를 부정하는 말 같기도 한데, 같은 별이 존재할 수 없듯이, 혼란도 다 같은 혼란이 아니다. 그것이 이 책과 내가 겹쳐지는 것, 동시에 어긋나는 것이다. ‘금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랑은 금기로부터 출발하는 거다. 금기가 아닌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해도 무방하다” 한 때 이 말을 믿었다. …언젠가 남성동성애에 동경을 가진 적이 있었다. ‘금기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역경을 감수한다는 것이, 한낱 호감과 충동으로 성립되는 연애보다 훨씬 진실하다고 여겼음으로.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을 믿는다. “사랑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극적이어서, 동화속의 성은 필요없더구나.”(『Ciel』-임주연) 역경이란, 목적을 위한 의욕을 자극하는 작은 촉매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할 말이 많지만 이만 줄이도록 한다. 애초에 끝이 없는 이야기다(웃음). 심지어 내 생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동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언급하고 마무리 짓겠다. 성준이 약탈 지역을 향해 뛰어가며 작품은 마친다. 고양이라는 환상적인 존재까지 곁들여서. 그 고양이는 말한다. 그곳에 미즈 장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교장도 은지도…… 모두모두 다 있을 거라고. 모두 가지 말라는 지역에 모두가 다 있을 거라고. 그 혼란 속에 답이 있을 거라고.
청소년을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했다. 상자 가장 깊은 곳, 밑바닥에 ‘희망’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가. 어둠과 고통, 절망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 발견하게 되는 희망. 판도라는 뚜껑이 열린 처음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포기하진 않았다. 그처럼 혼란 속에서, 폭풍 속에서 포기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마주한다면 답은 보이지 않을까. 도망가지 않고 폭풍의 눈 안으로 들어왔을 때 휩쓸리지 않고 비로소 조금은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책을 다 읽고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은 어떨까 생각했다. 또 여우비가 내릴까. 비가 내리긴 할까. ……다음날, 이 글을 쓰는 지금, 일정한 리듬의 굵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강하게 내리고 있었다. 언제 또다시 여우비로 변할지 모르고, 정말이지 알 수 없는 하늘이지만. 그래서 하늘 자체가 ‘여우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즐겁다. 날이 개면 바다를 보러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