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부르며 살았다』감상문
마종기 시작 에세이
시, 에세이, 그리고 일러스트
詩
1. 시詩란 노래歌, 춤舞, 말言, 대화話…… 삶과 세상의 모든 것. 시인이란 그 詩를 올바르게 즐길 줄 아는 사람. 이것이 시와 시인에 대한 나의 정의다. 그래서 그런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문득 종이에 적히는 시, 그 작은 의미의 시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고민하다 밤이 지났고 아침이 왔을 때, 나는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의 몇 구절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시라는 것이 읽는 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시의 효능이 고급스러운 유희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을까를 의심하며 또 희망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내가 내 시를 읽으며 받았던 정신적인 위로와 기쁨이 내 시를 읽어준 분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이 느낌은 평생을 의사로 살면서 내 노력으로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고 생명을 살리는 역할의 한 부분이 되어 느꼈던 희열, 바로 그 만큼의 희열을 내게 전해주었다.” 64p.
“그러면서 평생의 시의 목표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명이었고, 희망이었고, 하느님이었고, 무조건적인 인간의 이해심과 베풂이었다. (…) 나는 사람들의 착한 심성만이 세상의 최고 가치라고 믿기 시작했다.” 38p.
나는 이 시인의 말에 위로 받았고 기쁨을 얻었다. 내가 과연 그런 시를 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의심하기 전에 실천하기로, 노력하기로 했다. ‘자신을 믿지 않는 녀석에겐 노력할 가치도 없다.’라는 또 어느 누군가의 말을 되새기며.
2. ‘詩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실 질리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듣는다고 무조건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서. 문학 교과서에 아무리 ‘시란 이런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와 닿지가 않으니 시험범위일지라도 외우지 않았다. 이런 시에서는 이런 점, 저런 시에서는 저런 점을 설명하는 것을 보노라면 화가 치밀어 해석은 덮어놓고 시만 되풀이해 읽곤 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남은 시의 특징, 진정성…… 순수성……이런 것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리는데, 마종기 님의 시를 읽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진정이구나, 이게 순수구나……. 이게 淨水구나. 깨달은 것이다.
essay
“행동이 없이 관념의 추상 언어로만 지껄이는 문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 않은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 없는 문학이라고 믿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진부한 단어가 되어버린 사랑. 천 번을 다시 말해도 파릇파릇한 그 사랑만이, 참혹한 비극이 끝없이 이어지는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이고 힘이고 순수고 미래하고 나는 믿었다.” 44-445p.
이 분의 시를 읽는 것과 에세이를 읽는 것은 다르지가 않았다. 시에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전해 듣듯 알 수 있었고 에세이에서 좀 더 상세하게 알 수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똑같이 진정이 가득했다. 진정眞情이, 진실眞實이, 진심眞心이…… 눌려 담겨있다기보다 닦여있다는 느낌, 벼리어져있다는 느낌. 지금 이 표현을 찾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래, 이런 느낌.
illustration(詩畵)
위의 글을 닦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쓸 말은 많은 데 닦기가 너무 힘들어 그만 쓰고 일러스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펼친 순간부터 꼭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화(詩畵)란 무엇일까? 물론 모르지 않다. 그러나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다. 나는 이 시화에 너무나 감동해버린 것이다. 감동하고, 감격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시화는 그 시의 일부인가? 그림과 함께 시를 볼 때, 우리는 시에 감동하는 것인가 그림에 감동하는 것인가? 그림은 그저 보조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시화에 담긴 시에서 우리는 순수하게 시(詩)에 감동할 수 있는가? 수많은 물음표가 잇달았다.
이 일러스트는 시집의 일부를 분명히 구성하고 있었다. 일러스트 하나하나는 무척 아름다웠고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흥분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시의 메시지를 너무 잘 그려냈다. 이 시집에 담긴 모든 그림에 나는 감상문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생략하고 몇 개만 아래에 옮긴다.
<85p의 돌 그림> 시 원문의 투명함과 깨끗함을 잘 표현했다. 실제 물에 씻겨 반짝이는 돌을 그대로 그림에 옮기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그림은 단 한순간만을 그릴 수 있기에 실제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반짝이는 것을 담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물론 반짝이는 것은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투명함과 깨끗함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훌륭한 방식으로 그 난점을 해결한다. 돌의 그림자에 주목하라. 거울에 비친 듯 돌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시선이 저절로 왼쪽을 향한다. 작은 돌, 그리고 작은 시든 잎. 모두 투명하고 깨끗한 그림자를 달고 있다. 얼마나 깨끗한 돌인가. 얼마나 투명한 돌인가……. 끝내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88p의 멸치 그림> 이 역시도. 이 기우뚱한 마름표의 형태가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종교적 의미, 그런 것보다 일단 십자가는 희생, 수난들을 의미 하지 않은가. 멸치 몇 마리도 결코 단순히 그리지 않은 일러스트레이터의 정신이 정말 존경스럽다.
……시화는 시의 일부인가. 꼭, 언급하고 싶었다. 물론 마종기 님의 글도 무척 감동이지만, 이 일러스트에 대해 꼭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감상문 제목이 <시, 에세이 ‘그리고’ 일러스트>인 것이다.
감상문 후기: 4600자의 글을 썼고 그 중 절반을 올린다. 나는 그 절반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절반을 건져낸 것일까. 잠시 멍하니 있다 본격적으로 일러스트 감상문을 쓰기 시작했다. 꽃이 핀 다음 열매가 맺는다며 하고픈 말 많은 ‘시’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 감상문을 다 쓴 다음에 쓰겠노라 스스로에게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