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에서 우찬제가 작가의 작품을 ‘난장의 문학’, ‘존재론적 앎음’이라 평한 것은 수긍한다. 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괴물들이 벌이고 있는 난장판을 고작 자본주의, 산업사회, 유전공학 따위의 것들 운운하며 자신의 통렬한 비판의식에 자부심을 느꼈으리라 짐작했다면, 나는 우찬제의 게으른 독서방식에 안타까워해야 하거나, 아니면… 없다(분명 그의 학문적인 지식이 얕아서 생긴 오독은 아니다). 분명히 게을렀을 것이다.
작품에서의 이미지들을 비유적인 상징정도로 환원시키고자 마음 먹은 사람에게는 확실히 그의 말대로 비판적 색깔들이 보인다. 프랑켄슈타인(언어를 갖지 못한 혐오의 대상), 마녀(상상의 마녀를 축조해 내는 폭력적 다수), 퀴르발남작(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의 경우들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작가가 제시하는 상징, 비유, 은유, 환유라는 것들은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 속에서 의미를 포괄하는 어떤 알레고리를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지게끔 되어있다(부실공사와도 같이 말이다. 애초에 그의 작품을 무너짐을 운명으로 삼고있다).
<퀴르발남작의 성>에서 왜 작가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난장판을 만들었고,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단연 미끄러지는 의미들을 위해서였고, 그것은 작가 나름의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휘뚜루마뚜루 세계사 1>에서 ‘마녀패션’의 유행은 시장경제가 만든 역학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마녀를 둘러싼 문제들이 시대를 휘청거리며 어떻게 변형되어 미끄러지는지가 초점이라 보아야 한다. <그녀의 매듭>, <그림자 박제>들도 마찬가지로 해석해야 한다. 나는 이 대목이 분명 작가의 생목소리라 생각한다. 최제훈의 글을 읽을 때는 자신의 머릿속의 가치판단을… ‘미끄러트려라’
나:……예에, 그럼 선생님의 괴물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등등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셸리: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한숨)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