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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매력적인 입담
Book name
저자/역자
정수일
출판사명
창작과비평사 2002
출판년도
2002
독서시작일
2011년 01월 25일
독서종료일
2011년 01월 25일
서평작성자
**

Contents

사람은 종교를 강요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만약 종교의 믿음이 강압과 폭력, 그리고 감언이설의 토대위에 교리를 전파하고 세력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그 종교는 파도가 들이닥치기전의 모래성이다. 이처럼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우리가 알고있는 ‘한손에는 꾸란을, 한손에는 검을’ 이라는 실로는 있을수가 없는 말을 잊고 고정관념을 깬 순수한 눈으로 그들을 들여다보면 무슬림만큼  알라의 축복속에서 아름답지만 슬픈 모순적인 인류도 없을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최대 매력은 바로 강제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다시말해 반드시 이렇게 해야된다는 게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의식은 약자와 그렇게 행할 수 없는 자를 위해 정형의 틀에서 조금은 벗어나도 괜찮은 유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슬림들의 여유로운 생활태도에서 우리들의 정언적인 생활태도를 다시 돌이켜보게끔 만들기도 한다. 모든것은 알라만이 안다는 그들의 소박한 정신은 내가 그들 문화에 흡수되어 충분한 매력에 충분히 빠질 수 있게 도와줬다.


 


 자살테러가 종교적인데서 합법함을 찾고 그것이 영웅적인 행위의 일이 되어버린 요즘의 이슬람.


지하드는 신을 위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걸 뜻한다. 지하드는 무조건적인 전쟁과 폭력의 행위가 아니라 이슬람 사회의 국제적인 질서를 잘 이해해야지만 그것이 성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먼저 이슬람은 이슬람영역(무슬림)과 전쟁영역(비이슬람)으로 분류한다. 이슬람권 사람들은 비이슬람권 사람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평화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으나 때에 따라서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므로 이것은 알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정의내린 지하드는 오직 전쟁만을 이야기한다. 왜 그들은 평화적인 지하드를 외면하고 폭력적인 개념의 전쟁만을 바라보는 것일까. 물론 오늘날에는 지하드가 자살테러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알라의 이름으로 행해졌다하여 영웅적인 추대를 받기도 하는, 본래의 지하드의 개념이 퇴색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제공은 그들을 이해하고 감싸주기보다는 오직 전쟁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한마디로 서구인의 무식함이 만들어낸건 비극의 결과가 아닐까.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인들이 행해왔던 이슬람종교에 대한 탄압과 비방은 이제 그만 종식해야 할 때도 된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가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네들의 교리처럼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줄때이기도 하다. 몇몇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라 보는데 대립도 동일한 시각과 입장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기독교의 일방적인 이슬람 배척은 그들이 서구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 위에 넘쳐나는 자신감을 주체하지 못해서 오는 자만감때문은 아닐까.


 


 정수일이 어이없는 한국의 보안법때문에 옥중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글을 써내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고통속에서 정수일의 아주 명쾌하고 훌륭한 스콜라쉽이 빛을 발해 이슬람에 무지한 나를 일깨워줬다. 이슬람이 몸에 익고 그들의 생활을 무슬림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위해주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노련함과 독자를 압도시킬 수 있는 소박하지만 힘이 있는 문장의 바탕위에 보기드문 책한권이 나왔다. 요즘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내용없이 적어내려가고 그걸 베스트셀러에 올리기 위해 조작하는 어이없는 상황속에서도 많은 판매부수를 차지하는 이 책이 나는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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