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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
저자/역자
김영하,
출판사명
복복서가 2020
출판년도
2020
독서시작일
2020년 12월 28일
독서종료일
2020년 12월 28일

Contents

 외국은커녕 옆 도시로 이동하는 것조차 자제해야 하는 코로나 시대에 여행서를 읽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또 있을까? 여행지에서 쓴 에세이를 읽는 것은 나의 오랜 취미로, 경험하고 싶은 나라가 생기면 여행서부터 찾아왔다. 몇 장의 사진과 글로 이루어진 여행의 도착지는 영국이었다가 프라하가 되었고 제주도, 홍콩, 뉴욕, 스위스, 네팔까지 온 세계를 망라해 여행지를 모으면 엉성한 세계 지도를 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는 떠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의 취미임을 올해 알게 되었다. 떠날 방법도 여유도 없는 상황에 비행기를 기다리는 새벽 공항의 설렘,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맛집, 거기서 만난 새로운 인연과 즐거웠던 추억들로 가득한 책을 읽으려니 부러움과 괴로움에 속이 끓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었냐 하면, 사실은 잘 모르겠다. 도대체가 반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여행의 이유를 대신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작은 섬으로 작가가 이전에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다녀온 곳이었다. 몇 시간 동안 타임랩스로 촬영한 영상을 삼 초에 보여주는 느린 다큐를 촬영하며 일주일 동안 갖은 고생을 한 작가는 그로부터 5개월 만에 다시 시칠리아를 찾는다.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에선 발견하지 못한 따사로운 햇볕과 사이프러스,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에 이끌려서.

 시칠리아의 섬들을 여행하던 작가는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서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서울생활에 적응하기 바쁜 사람들 속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에서 처음으로 집단에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노천극장에 앉아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노래를 부르던 그날을 시라쿠사의 석회암 계단에 앉아 회상한다. 내게도 고등학교는 참 이상한 시절이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데도 섞이지 못 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서울에 상경하거나 이사를 가는 일 없이 중학교 친구 몇몇과 함께 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도, 문득 혼자 떠있는 기분이 되었다. 나와 작가의 다른 점이라면 나는 아직도 어딘가에 일체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학교에 그리스식 극장이 없어서일까? 그도 그럴 것이 신축 건물로 이뤄진 캠퍼스는 깨끗하지만 정을 붙이기엔 어려운 곳이었다. 파란 유리창이 붙은 건물은 대학보단 회사에 가까워 보였다. 동아리에 들어가고 친구를 사귀었으나 하나가 된다는 감정은 다른 차원에서나 가능한 일로 느껴졌다. 학교에 가지도 않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노트북에 소속감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여행서를 즐겨 읽던 이유를 하나 찾았다. 낯선 여행지에서 떠오른 생각들,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으로 잠겼던 시간에 이끌렸던 것이다. 나는 비록 방 안에 앉아있을 뿐이지만 새로운 길을 걸으며 생각한 것들을 함께 헤아리게 되는 것이 좋았다. 시칠리아는 사실 한 권의 책으로 쓰일 만큼 대단한 볼거리를 가진 곳은 아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과 거의 온전히 보존된 신전이 있지만 섬으로 들어가는 기차가 자주 취소되어 관광객이 찾기는 까다로운 곳이다. 그 섬에서 작가는 무수한 생각들을 끌어올린다. 신전을 걷고, 직접 요리를 해서 먹고, 스쿠터를 타고 리파리 섬을 돌아보며 자신 안에 내버려져 있던 젊은 예술가의 영혼을 찾는다. 책의 마지막에 작가는 Memory Lost라 쓰인 역 입구의 전광판을 보고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을 떠올린다. 시칠리아는 대학에서 소설 쓰기를 강의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소설을 쓸 수는 없는 일상에 지쳐 거의 모든 것을 끝내거나 잠시 보관해둔 채로 떠난 곳이었다. 나는 올해 어떤 것을 잃어버렸던가. 무엇을 어디에 보관하고 어디로 떠나야 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이것으로 또 한 편의 글을 세상으로 흘려보낸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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