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이는 밤이 있다. 잠에 빠지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드는 열대야. 김연수의『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책장을 덮으면 그런 밤이 떠오른다. 잠에 빠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곤 그의 자장가를 들어 보자.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소설집이지만 간단한 설명에 비해 수록된 작품의 숫자는 낯설다. 20편의 소설을 순서대로 읽고 있으면 시시각각 바뀌는 목차에 따라 흔들거리며 읽게 된다. 그러나 이는 리듬에 맞춰 흔들거리는 것은 아니다. 천천히 가속도를 붙여 잠에서 깨우는 활동적인 호흡, 빠르게 뛰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조절해 나가는 담백한 호흡. 자극적인 쾌락도, 억지스러운 눈물도 요구하지 않는 이 책은 후자를 닮았다. 한 편을 마친 뒤 다음 작품을 들이마시는 순간은 빠르게 다가온다. 그러나 다음 작품이 들어온 순간, 한편의 공기는 깊게 우리의 몸에 체류한다.
잠이라는 환상에 다이빙하는 우리는 낯선 경험을 한다. 탁하면서도 맑고, 무언가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매질을 부유하고 있을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과도 같으면서 모든 게 허구인 세계에 가깝다. 책에는 밤 아홉 시 이후로 떠오르는 생각을 믿지 말란 농담. 어쩌면 진담일지도 모를 이 문장에 가까운 작품들이 촘촘히 나열되어 있다. 읽으면서 내가 수필을 읽는지 소설을 읽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이 책을 누구보다 오롯이 느끼고 있단 증거겠다.
김연수는 자신의 열대야, 그 아득하고 깊은 순간에 우리를 초대한다. 경험인지, 상상인지 모를 바다에서 우리는 헤엄친다. 때로 예쁜 산호초를 찾아 흥분하기도 하고, 고고하게 헤엄치는 고래를 바라보며 가끔은 숙연해진다. 혹여 너무 깊은 곳으로 빠져 버릴까, 우리의 손을 붙잡고 다른 곳을 둘러보자는 눈빛엔 저자가 지난 세월 지내온 불면의 밤이 서려 있다. 그러나 때로 성급하다고 느껴지는 손짓이 마냥 거칠지는 않다. 그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던 많은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읽으면 읽을수록 소소하다. 심지어 밋밋하기까지 하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장면, 문장, 생각이 작품과 책 곳곳에 실려 있다. 저자는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혹시 나였을까. 내 주변, 오늘 무심코 눈길을 줬던 그 사람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어쩔 땐 라디오 듣듯 흘러가는 인생인가 하면 지금은 도저히 잠에 빠지고 싶지 않은 흥미진진한 하루도 있다.
책에는 아주 환상적인 설정의 서사도, 몸에 전율을 일으킬 만큼 강한 반전을 주는 작품도 없다. 오히려 철저히 현실에 배경을 둔 그의 작품은 어떨 땐 잔인해 보이는 순간조차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나’, 그리고 ‘너’를 찾는다. 작품 속의 인물들. 우리는 오늘 길거리에서 지나쳤을 것만 같은 이들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들과 함께 웃기도 하며 때로는 눈시울을 붉힌다. 함께 커피숍에 앉아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누군가 정성스레 써준 손 편지를 읽고 답장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러 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어느새 나 혹은 너의 이야기에 맞춰 흔들거리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시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못해 흘려보내야 했던 찰나가 잠들기 전 베갯잇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며 후회하는 장면도 있고 그래도 좋았다고 혼자 피식거리는 때도 있다. 미소와 한숨이 교차하는 밤에, 어쩌면 삶과 구분되지 않는 시간 앞에 차마 머뭇거리게 된다. 스스로 밤에 깊게 빠져들지 못하겠다면,『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통해 김연수의 밤을 잠수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밤을 빌려서 보낸 수많은 여름이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