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
소장자료
>
000 cam k
001 2210080881961
005 20200921104946
007 ta
008 191112s2019 ulkb 001c kor
020 a9788994606552g93910 :c\19000
035 a(KERIS)BIB000015411047
040 a211023c211023d221008
041 akorheng
056 a911.055325
245 00 a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d김자현 지음 ;e윌리엄 하부시,e김지수 [공]편집 ;e주채영 옮김
260 a서울 :b너머북스,c2019
300 a286 p. :b지도 ;c22 cm
500 a김자현의 영어이름은 'JaHyun Kim Haboush' 임
500 a2020년도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도서임
504 a참고문헌(p. 269-279) 및 색인 수록
507 t(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
541 c수증;d2020e(E1171595)
653 a한국사a조선시대a임진전쟁a임진왜란a동아시아사
700 a김자현,e지음
700 aHaboush, William Joseph,e편집
700 a주채영,e옮김
900 aHaboush, JaHyun Kim
900 a하부시, 윌리엄
950 0 b\19000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종류
단행본 국내서
서명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저자명
발행사항
서울 : 너머북스 2019
형태사항
286 p : 지도 ; 22 cm
주기사항
김자현의 영어이름은 'JaHyun Kim Haboush' 임 / 2020년도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도서임 / 참고문헌(p. 269-279) 및 색인 수록

소장정보

청구기호 : 911.0553 김72임
도서예약
서가부재도서 신고
보존서고신청
캠퍼스대출
우선정리신청
검색지인쇄
등록번호 청구기호 별치기호 소장위치 대출상태 반납예정일 서비스
등록번호
E1171595
청구기호
911.0553 김72임 =3
별치기호
소장위치
제2자료실(한림도서관5층)
대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서비스
서가부재도서 신고
캠퍼스대출
등록번호
E1371464
청구기호
911.0553 김72임
별치기호
소장위치
제2자료실(한림도서관5층)
대출상태
대출중 ( 2025.06.05 ~ 2025.06.19 )
반납예정일
2025.06.19
서비스
등록번호
E1371465
청구기호
911.0553 김72임 =2
별치기호
소장위치
부민자료실
대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서비스
서가부재도서 신고
캠퍼스대출

책소개

동아인 서평

김자현
강화정
2023-07-01
Ⅰ. 서론 일반적인 역사 교육을 받아오면서 대다수의 사람이 성립한 임진전쟁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일본이 급작스럽게 공격하는 바람에 조선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였고, 명의 힘을 빌려 겨우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수와 훼손된 문화재, 문서 등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조선의 붕괴나 다름없던, 조선인에게는 지옥과 같은 전쟁이었다.’ 간혹 이러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더 나아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임진전쟁은 조선의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기준으로 삼을 만큼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전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뿐이다. 임진전쟁에 관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 곽재우와 같은 잘 알려진 의병장들의 활약, 선조의 도망 등 이미 수면 위로 떠 오르다 못해 임진전쟁의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사건들 외에는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주목받지 못한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선조의 도망 이후 어떻게 의병장들과 관군이 연합했는지, 의병장 등 일본군에 맞서 싸우려 했던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어났는지, 그 당시 임진전쟁은 어떻게, 어떤 수단을 통해 평가되었는지 등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역사와 관련된 학과의 학생이거나 역사를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을 것이다.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의 저자인 김자현은 위에서 제시한 궁금증을 포함한 여러 주제를 제시하며 임진전쟁에 대해 자세히 풀어나갔다. 그리고 애국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임진전쟁과 연결 지었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제법 존재했다. 본론에서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반박함과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풀어보려고 한다. Ⅱ. 본론 2-1. 민족에 대한 서술 저자는 의병대장이 사용한 수사에 민족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말과 함께 민족이라는 개념이 임진전쟁을 거치며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전쟁 과정에서 이민족이 등장하면서 민족 개념이 등장하였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조선 건국 이후 임진전쟁까지 평화 속에서 지내왔던 조선인들은 아마 ‘우리’라는 개념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란 같은 문화, 언어를 공유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긴 하나, 당시에는 하나의 문화, 하나의 언어뿐이니 ‘다름’은 커녕 ‘같음’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민족이란 개념은 당연히 존재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조선인들은 전쟁을 겪으며 처음으로 ‘이민족(외국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들의 문화, 언어를 접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다름’을 인지했으리라 추정한다. 그와 동시에 ‘이민족’과 ‘우리’를 구분하였을 것이다. 임진전쟁은 ‘우리’와 ‘다른’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 그리고 ‘같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우리’라는 개념이 확립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비교 대상이 존재해야 ‘같음’을 공유하는 집단인 ‘민족’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민족이 구축되는 시작 단계이다. 저자는 벨의 주장을 인용하기도 했다. 벨은 ‘프랑스인은 인간의 삶에서 신이 물러난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17세기 후반부터 조국과 민족에 대한 더 강한 애착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이 빈자리를 18세기에는 위대한 프랑스인에 대한 숭배로 대체했다는 관점을 유지’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신의 빈자리를 프랑스인에 대한 숭배로 대체했다면, 조선에서의 민족 개념의 등장도 비슷한 흐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쟁 상황에서 왕의 도망 등으로 지배층의 부재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지배층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서 그 믿음을 함께 생활한 자들에게 돌린 것은 아닐까? 서양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절대적인 종교가 없고 그 자리를 왕 또는 황제가 채웠던 만큼, 백성들이 느꼈던 감정은 비슷하리라 본다. 프랑스인들이 신의 빈자리를 체감한 것과 조선인들이 왕실의 침체를 인지한 것은 비슷한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민족 개념의 형성 이유를 ‘방향을 잃은 신뢰의 자리를 새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민족 개념의 출현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해 보겠다. ‘방향을 잃은 신뢰의 자리를 새로 찾아가는 과정’이 민족 개념의 출현 이유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민족 개념의 형성에 격문을 빼놓을 순 없다. 저자는 격문을 쓰고 전파하는 과정이 공동체 협동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민족의 기원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동일한 목적하에 활동함으로써 ‘우리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이 인식에 기반하여 모든 활동이 진행 및 전파된다면 민족 개념의 형성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산과 강 등으로 가로막혀 타지역과 소통하지 못한 조선인들이 격문을 통해 타지역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이들 또한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활동하고 있구나’ 등의 인식이 퍼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동질성을 부여하고, 동질성이 민족성으로 발전할 것이다. 결국 민족 개념의 출현에는 격문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금부터는 저자의 서술에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 반박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동아시아 학자 일부의 주장인 ‘동아시아와 서양의 민족 개념이 동등하거나 일치하며 혹은 호혜가 가능하다’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동아시아와 서양의 민족 개념이 동등, 일치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동아시아의 민족은 국가 주도의 종교, 문화 등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면, 서양의 민족은 프랑스 혁명과 같이 국가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통해 주체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는 국가와 민중의 위치이다. 동아시아는 국가 차원에서 토지를 구분하였다. 조선을 예로 들자면, 국토를 국가 차원에서 전라도, 경상도 등의 ‘도’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같은 도 내에 사는 이들끼리 동일한 문화를 형성하고, 공유한다. 필자는 동아시아 내에서는 국가에 의해 은연 중에 민족이 형성되고 있었고, 전쟁을 기점으로 지배층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이 인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에 서양은 국가에 반대하면서 민족 개념이 등장했다고 본다. 물론 서양도 봉건제 등으로 지배층의 주도하에 일차적 토지 구분이 진행되긴 하였으나, 필자는 이보다 동아시아와의 차이점에 집중했다. 서양은 종교 탄압에 대한 반대, 지배층의 폭정에 대한 분노 등에 기반하여 민족 개념이 등장했을 것이다. 함께 노동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국가에 반대하면서’ 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결국 동아시아는 국가가 주도하는 과정에서 민족 개념이 발전한 거라면, 서양은 주체적으로 민족을 형성했다고 본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다는 판가름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동아시아와 서양의 민족 개념 발생 차이를 논해본 것이다. 또한, ‘민족담론이 두 언어적 공간 사이의 구분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서며 접근성을 제공하고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못한다. 임진전쟁 이후, 즉 민족 개념의 출현 이후에도 한자 사용자와 한글 사용자에는 명백한 구분이 존재했다. 저자가 제시한 것처럼 한자는 중앙의 것이고 공공적이며 남성적, 한글은 지방적이고 사적이며 여성적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했다. 백성들의 소송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김만중의 딸인 김씨 부인의 상언은 대표적인 소송 사례로 꼽히기도 하지만, 여성의 위치와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에 대해 잘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김씨 부인은 한글 상언을 올림으로써 본인이 ‘한자를 배우지 못한 수준의 여성’임을 드러냈다. 김씨 부인의 상언은 임진전쟁이 끝나고 100년 이상이 흐른 뒤에도 한글은 한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결국 민족 개념이 등장하였음에도 두 언어적 공간 사이의 구분을 허물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2-2. 애국에 대한 서술 저자는 민족 출현과 더불어 애국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필자는 ‘임진전쟁 중 지배층이 아닌 자들의 모든 활동을 애국으로 포장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의병 발발, 이순신의 활동, 논개의 사례 등을 제시하면서 이들의 활동은 모두 애국에 근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애국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본다. 첫째, 의병의 경우에는 가장 애국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개인의 가족, 가문, 재산 등을 지키는 공통된 목적을 가졌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애국과 무관하다. 개인의 의지일 뿐이다. 물론 전쟁이 고조되는 과정에서는 애국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의병운동의 시작에는 애국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관군이 무너지자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한 개인들이 그들의 의지로 모여 의병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격문을 통해 타지역과 소통하며 동질성, 민족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애국으로 보는 것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어쩌면 의병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의병장의 사망 등에 분노하며 하나로 뭉치고, 의병장을 죽인 적군에게 분노하여 ‘저런 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길 순 없지’ 등의 마음이 든 건 아닐까? 양반들이 의병 운동에 가담한 것 또한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이미지를 생각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 되었든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의병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에 애국이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때 저자는 애국을 설명하기 위해 송제민의 주장인 ‘이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기 지역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잃었을지도 모르는 진정한 본성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 주장했다’를 활용했다. 하지만 필자는 송제민의 주장 중 ‘이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기 지역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까지만 동의하는 바이다. 둘째, 이순신의 사례이다. 필자가 생각하였을 때 이순신 역시 자기 할 일을 한 인물일 뿐이다. 일시적으로 백의종군이긴 하였으나, 결국 해군 사령관으로 재임명되긴 했으니 말이다. 원균은 처참하게 패배하였기 때문에 대두되지 못한 것이고, 이순신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에 영웅 이미지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순신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에 따라 왜군이 왕이 있는 수도까지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뿐이다. 충과 애국은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필자의 주장은 의병운동은 개인을 위한 것이고, 이순신과 같은 장군들은 자신의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는 거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 중 논개는 애국적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그 외의 사례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애국적 얼굴에 포함된 것을 통해 조선이 임진전쟁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논개와 같은 기생까지 애국적 얼굴에 포함시킨 걸 통해 당시 조선 조정이 임진전쟁의 이미지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 임진전쟁의 이미지가 조선 조정이 꿈꾸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애국이라는 포장이 잘 된 것이다. 2-3 외국인을 처음 접한 조선인과 일본인 3장 <일본의 혼란한 공간 침투> 중 ‘이들은 바다를 건널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문장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모두 임진전쟁을 통해 외국인을 처음 접했다. 일본인의 경우에는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외국인’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임진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종류를 3개로 구분해 보았다. 처음은 조선인의 경우이다. 조선인은 평화 속에서 살아오다가 임진전쟁을 통해 처음으로 평화가 깨졌고, 삶의 터전이 붕괴되고, 외국인을 처음 접했다. 그런 조선인들에게 처음으로 인식된 외국인이라는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불시에 쳐들어와 나를 해하려 들고, 내 가족과 이웃을 죽이고,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곳을 불길로 감싸는 그들에게 두려움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으리라 본다. 어쩌면 조선인에게 외국인은, 저자의 말을 빌려 ‘멸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한 존재였을 것이다. 둘째는 조선 땅을 밟은 일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인도 일반 일본군처럼 조선 땅을 밟은 자가 있고 히데요시와 같이 일본 본토에 있던 자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그들은 조선을 대상으로 한 전쟁은 예상에 없었을 것이다. 상부로부터 조선은 전쟁 의지가 없다는 말을 전해 받았을 것이고, 그 말을 믿고 단순히 ‘지나가는 길’이었던 조선에 상륙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부의 말과는 달리 상륙하기도 전에 공격을 가하는 조선인을 보고 ‘거짓을 일삼는 비열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조선인이 거짓으로 일본에 협조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고 생각하여 천황 등 일본 지배층을 기만한다 생각하고 공격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왜 그들이 조선에 무차별한 폭력을 가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첫 외국인, 첫 외국 땅은 부정적인 이미지로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일본 본토에 있던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중에도 히데요시와 같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서술해보겠다. 물론 이들도 조선 땅을 밟은 일본인들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거짓 협조 서신을 보내고, 막상 일본군이 조선 땅을 밟으니 돌변한 비열한 민족. 그리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더 나아가 ‘조선만 아니었더라면, 불필요한 곳에 병력을 쓰지 않고 명을 정복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등의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일본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조선과 싸울 생각이 0에 수렴하였는데, 조선의 돌변한 태도로 인해 불필요한 곳에 병력을 쓰고, 최종적으로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닌 결과를 낳았으니 그 심정이 몹시 상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도 첫 외국인에 대한 생각은 비열 그 자체였으리라. 최종적으로 조선인에게나 일본인에게나 첫 외국인에 대한 소감을 묻게 된다면, 높은 비율로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고, 대충 추려 ‘최악이었다’ 등의 반응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진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외국인-조선인은 일본인을, 일본인은 조선인을-을 처음 접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가득 차진 않았을 것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외국인이라는 개념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것은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다. Ⅲ. 결론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을 읽으면서 임진전쟁 과정에서 격문이 활용되는 과정 등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처음 외국인을 접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저자의 의견 대부분에 의문을 가졌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꽤 많았으나, 그 덕에 스스로 생각을 정리해 보고, 그리고 있던 임진왜란의 이미지를 구체화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임진전쟁이란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큰 사건이고, 이를 기점으로 조선에 많은 변화가 불어오기도 했다. 불어온 변화가 모두 긍정적이라거나 모두 부정적이라는 단편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평화만이 가득했던 조선에 어떠한 방향으로든 변화라는 바람이 불어왔다는 것 자체가 다행이라 생각한다. 만일 일본과 조선 사이에 임진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는 한국사의 대부분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임진전쟁 때문에 조선이 어떻게 변화하였다 비판할지라도, 필자는 임진전쟁 덕에 조선에 변화가 발생했고, 그 변화 덕에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가 존재한다고 본다. 임진전쟁에 대해서는 아직 필자가 모르는 사실이 더 많겠지만, 그 사실을 접하고 이해하기까지가 역사를 전공하는 이로써 역사 공부를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본다. 한 사건에 대해 여러 생각을 들게 해 주는 책이었다.
전체 메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