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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00 a설탕, 근대의 혁명 :b한국 설탕산업과 소비의 역사 /d이은희 지음
260 a파주 :b지식산업사,c2018
300 a512 p. :b삽화, 도표 ;c23 cm
500 00 a2019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임
504 a참고문헌(p. 482-501) 및 색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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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근대의 혁명 :한국 설탕산업과 소비의 역사
종류
단행본 국내서
서명
설탕, 근대의 혁명 :한국 설탕산업과 소비의 역사
저자명
이은희 지음
발행사항
파주 : 지식산업사 2018
형태사항
512 p : 삽화, 도표 ; 23 cm
주기사항
2019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임 / 참고문헌(p. 482-501) 및 색인수록

소장정보

청구기호 : 574.1 이67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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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167782
청구기호
574.1 이67설 =3
별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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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1 이67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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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167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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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34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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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1 이67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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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자료실(한림도서관5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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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342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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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1 이67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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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아인 서평

이은희
장지승
2023-05-01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선 설탕세 도입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겁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점차 설탕세를 부과하는 국가가 늘더니 2018년 영국도 설탕세를 도입하며 화제 되었습니다. 이어 영국에서는 설탕세 도입 이후 매년 6,000명 이상의 초등 6학년 여자 어린이의 비만을 예방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건강은 장수 생활을 위해 단연 뜨거운 관심사이기에 이에 대한 각종 연구 결과 및 그에 따른 국가 정책들이 중요한 토픽이 됩니다. 이러한 현상 속 가장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바로 현대인들의 당류 섭취이며 이로 대표되는 설탕입니다. 설탕은 1953년 11월 5일 제일 제당 부산공장에서 국내 최초로 생산되었습니다. 1950년대 초반, 설탕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물품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기에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탕의 공급 부족 현상과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당시 한국 사회에도 여러 영향을 끼쳤습니다. 최근 국제 설탕 가격이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며 요즘 현대 사회에서도 일명 \’슈가플레이션\’ 이라 불리는 세계적 설탕 가격구조는 과거와 다르지만 또 유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오랜 기간이 지나도 뜨거운 감자인 설탕이 한국에서의 등장부터 세계 설탕시장으로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한국 설탕산업에 대해 이 책은 서술합니다. 책에서는 한국 근대 설탕산업을 세 가지 갈래로 나눠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을 겪으며 일본 제국주의 자본 아래 시행된 설탕 정책 및 가격구조가 당시 식민지 조선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였습니다. 조선은 온대 지역이므로 사탕수수 재배에도 적합하지 않았고, 정책적으로 전근대 아시아 해상 무역망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해금 정책 국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설탕은 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 황실로부터 하사받는 조공 답례품으로 수입하는 통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 조선에서 온 중국 사신이 더 이상 설탕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중국에서 설탕이 아주 대중화되었기에 중국인에게는 하찮은 일상품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왕실 제사에서나 쓰는 귀중품이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설탕을 사치한 물건으로 여겨 수입을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 아주 극소량만이 중국과의 육로를 통해 수입되었습니다. 개항 이후 해로를 통해 개항장인 인천으로 총 수입량의 2/3가 들어왔습니다. 전통적인 무역로와 무역 주체가 개항 후 빠르게 변화를 겪으며 조선도 세계 무역망 속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은 더욱 본격화되었습니다. 영국계 상사인 홈 링거 양행은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 지점을 세우고 조선에 설탕을 비롯한 여러 수입물품을 판매하였습니다. 이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 설탕 무역 주도권은 일본 상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일본 정부의 정치적 지원을 받아 한국 시장을 독점하며 급성장하였습니다. 1902~1903년까지 일본에서의 설탕 수입량은 전체 수입량의 17~18% 정도였지만, 러일전쟁 이후 빠르게 상승하다 90%를 넘으며 일본 상인이 한국 시장을 독차지한 정도였습니다. 일제는 1917년 조선에 제당회사 설립을 허가하였고, 조선통감부는 20세기 초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는 상품작물인 사탕무에 관심을 가져 사탕무 농업을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실패한 산업으로 전락하였는데 그러한 여러 배경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사탕무 제당 기술이 발전하면서 1884년부터 세계 설탕 가격이 줄곧 하락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에서는 생활필수품인 설탕이 부족해지자 비상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일본은 전시 호황에 힘입어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 프랑스까지도 수출하였습니다. 이어 일본의 제당회사들은 조선 사탕무 제당업으로 진출을 꾀했고, 통감부, 조선총독부, 일본 자본가는 사탕무 재배를 식민지 농업정책 하나로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사탕무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여 추론된 잘못된 예상 결과를 가지고 사탕무 재배를 섣불러 실시하였으니 이는 대표적으로 실패한 식민 농정 사례로 꼽힙니다. 과거 한국은 설탕 소비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에 개항 이후 설탕 가공식품이 유입되고, 그에 따른 근대 식품산업이 성장하고 이러한 외래 음식의 맛에 점차 친숙해져갔습니다. 설탕이 사치품이라 아주 귀하던 조선에서는 꿀을 이용하여 단맛을 내곤 하였지만, 이또한 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설탕까진 아니었더라도 꿀도 상당히 귀한 식재료였기에 조선인들에게 단맛이란 그리 익숙한 맛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1910년대 조선 식민지화에 성공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동맹국으로 전시 호황을 누리며 제과업 같은 소비재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일본 내 제과점이 조선 시장을 공략하였고, 일본 내 제과회사가 조선에 설립되거나 조선 내 영세 일본 제과 상인들이 모여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빙수 가게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말까지는 천연빙만 있었으나 1900년대 말부터 인조빙을 만드는 제빙소가 세워졌습니다. 빙수 가게는 제빙 회사나 천연빙 저장소인 빙고가 있는 대도시에 있었습니다. 빙수 가게는 계속 늘어났고 조선인도 쉽게 개업할 수 있었습니다. 빙수 가게는 대게 이동식이었는데, 이들은 냉차를 \’아이스크림\’ 이라 부르며 팔았습니다. 당시 \’아이스크림\’ 은 인조첨가물인 \’딸기물\’을 섞은 얼음물이나 냉수 설탕물 등을 의미했습니다. 이어 다소 발전한 형태인 \’아이스케키\’가 1932년 무렵 식민지 조선에 등장하였습니다. 여름에 가장 기온이 높은 대구의 경우 아이스케키 제조공장이 1936년 약 217개소 정도로 많았습니다. 수공업으로 소량 생산하던 빙수, 냉차와 달리 아이스케키는 대량 생산되었습니다. 이처럼 1932년 조선에 아이스케키는 등장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조선인들에겐 새로운 단맛의 경험이었고, 겨울이 아닌 여름에 차가운 단맛을 즐기는 것 그 자체가 근대 문명의 수혜라 여겨졌습니다. 아이스케키의 등장은 냉차의 자취를 감추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설탕 소비는 계층 차이, 민족적 정체성, 도시화와 관련하여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설탕은 도입 초기 문명화와 경제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근대화를 지향하는 생활개선론자들은 서구나 일본 문화에 견주어 조선 음식이 뒤처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 음식에서의 반찬은 대개 밥을 먹기 위한 것 위주고, 영양과 소화를 고려하지 않기에 영양소가 작은 자극성 식물을 많이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1910년대 여학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고추와 설탕을 대비시켜 \”조선 사람은 고추를 함부로 먹으니까 머리가 나빠져서 성적이 나쁘다\” 라고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문명한 나라일수록 설탕을 많이 소비한다는 서구에서 만들어낸 설탕 문명화론을 절대적으로 믿고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문명 개화론자들의 영향으로 조선 음식에 설탕을 비롯한 아지노모도, 양조간장과 같은 외래 상품을 넣어 전통적인 음식을 개량하는 요리법을 개발하고 이를 상류층 여성들에게 전파시켰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정제당 국산화로 공급량이 증가하며 일반인들도 요리법 개발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매운맛을 줄여가며 일식 요리법으로 조금씩 바뀌어가던 것과는 달리 매운맛을 오히려 늘렸습니다. 설탕과 고추의 결합은 오히려 설탕이 한국 사회에 현지화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설탕이 한국인 음식문화의 일부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 현대 사회에서 설탕은 음식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뿐 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설탕의 소비량이 엄청나게 증가하며 이제는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설탕은 비만의 주범이라 불리며 각국 정부는 설탕 줄이기 캠페인에 몰두하고 있는 현 상황입니다. 단순히 맛을 내는 조미 원료의 개념으로만 가볍게 접근하는 설탕이 아닌 설탕의 수입과 그로 인한 각종 식민지하 정책과 사회 구조와 맞물린 설탕의 역사는 한국인들의 역사적 기록 속에서 뗄 수 없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설탕으로 말미암아 한국 전통음식 맛이 대부분 바뀌었고, 한국인들의 입맛, 취향, 신체까지 과거와 상당히 많이 변화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 녹아든 설탕과 유사하게 녹아든 다른 식재료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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