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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00 a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d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e박상훈 옮김
260 a서울 :b후마니타스,c2014
300 a347 p. :b삽화 ;c21 cm
500 00 a원저자명: Machiavelli, Niccolo
507 t(Il) principe
650 aPolitical science
650 aPolitical ethics
700 aMachiavelli, Niccolo,d1469-1527
700 a박상훈,e역
700 a마키아벨리, 니콜로,e저
740 a군주론
950 0 b\15000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종류
단행본 국내서
서명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발행사항
서울 : 후마니타스 2014
형태사항
347 p : 삽화 ; 21 cm
주기사항
원저자명: Machiavelli, Niccolo

소장정보

청구기호 : 340.265 마878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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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265 마878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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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265 마878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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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아인 서평

Machiavelli, Niccolo,
2016-12-31
*이 서평은 『한비자』와 『군주론』을 한데 묶어 써내려간 서평임을 밝힌다.    서설, 민주주의적 제왕학  여기, 군주론 혹은 통치술이라고 불리는 제왕학(帝王學)의 대가가 있다. 서양의 마키아벨리, 동양의 한비가 그 대가들이다. 이 둘은 군주가 어떻게 위엄과 권세를 갖추고 누리는지 그 원리원칙을 밝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마키아벨리와 한비를 오해하고, 오판하는 자가 많다.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은 어떤 권모술수도 용인하는 사상으로 풀이되고, 법가(法家)는 백성을 형벌로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으로 이해된다. 이 두 사상가가 말하는 바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이해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한비의 「한비자」가 그런 측면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원본을 읽지 않고 제목이 주는 단편적 인식에 말미암아 이런 선입견을 갖는 것이 지양해야 할 터다.  그렇다고 해도, 민주주의가 일상화된 현재에서 이런 제왕학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아직도 세계 여러 나라가 독재정치와 군주제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 해도, 우리나라는 진즉에 봉건왕조를 타파하고 민주정을 이룩한 것인즉, 제왕학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지 묻는 것이다. 단순히 조직생활에 필요한 교양, 지식이 목적이면 충분할 터이나 그 이상 필요가 있어 읽을 필요가 있는가?  참으로 옳은 질문이다. 일견 제왕학은 민주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끝난 걸로 보인다. 하지만, 제왕학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효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두 군주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민주주의를 살펴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중이 스스로 지배하는 정치제도다. 민중이 지배자이고, 피지배자가 되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다음에 현실에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2단계를 나눠보자. 첫 번째 단계에서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민주정을 택한 국가의 주권자는 시민이다. 시민 하나하나가 주권을 갖고 있다. 이런 시민을 군주라고 칭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군주로 칭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민주주의에 군주가 있다고 한다. 이제 두 번째 단계에서 군주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자. 시민 하나가 수십이면, 시민의 숫자만큼 군주가 있는 모양이 된다. 군주가 수십, 수백을 넘어 백만, 천만의 단위를 넘어가니 정국이 혼란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 시민은 선거와 투표라는 제도를 통해서 대통령, 혹은 총리를, 국회의원을, 장관을, 대법원장을 직·간접적으로 세웠다. 국회의원, 대통령 혹은 총리는 시민이라 불리는 군주로부터 전부라 해도 될 정도의 통치권한을 위임 받았다. 즉, 이들은 한시적이나마 군주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이에 민주주의에서 두 군주가 상존한다고 하는 것이다. 첫째가 주권자인 시민이요, 둘째가 주권을 직접 위임받은 집정관들, 바로 국회의원, 총리, 대통령을 말한다.  작금의 정치를 보자. 금년에 이르러 드러난 군주의 폭정과 신하의 패악을 보라. 상인에게 뇌물을 요구하고, 청탁에 따라 등용하고, 관직을 금전으로 매매하고, 군대를 쇠약하게 한, 폭군과 간신의 협잡질을 보라. 대통령을 탄핵하고, 그 밑에 있는 공무원 여럿을 수사하고 있다만, 그 전에 이들의 전횡이 국가에 끼친 손해를 생각하면 한탄스럽다. 실정(失政)이 행해진 까닭은 군주가 제왕학을 몰랐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실패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민주정에서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군주, 바로 시민의 실패를 이르는 것이다. 누구나 통감하다시피, 실정은 앞으로 되풀이되어서 안 된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통치술이고, 군주론이고, 제왕학이다. 이에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를 민주주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시민이 민주공화국의 군주로 갖춰야할 덕성을 밝히고 정치의 원리원칙을 알리는 것, 이것이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첫 번째 본론, 정치적 현실주의 : 성악설 「군주론」과 「한비자」에서 공통적으로 밝히는 정치의 원리원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현실주의다. 그 현실주의란, 다름 아닌‘성악설’이다. 한비도, 마키아벨리도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성악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정치 무대에 올라간 사람을 직접 관찰하고, 그 결과를 모으고, 역사를 면밀히 검토하여 내린 결론이‘성악설’인 것이다. 한비는 「한비자」에서 수도 없이 많은 일례를 든다. 신하가 음모하여 군주를 해치고 권좌를 찬탈한 이야기, 왕비가 군주인 남편을 독살한 이야기, 군주가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쫓아낸 이야기,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선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유명한 문구로 성악설을 시사한다. “위인들 사이에서는 지난날의 원한이 새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깨끗이 씻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즉, 사람은 이해득실을 따지기 때문에 정의와 선에 따르지 않고, 친인이라도 망설이지 않고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인연 없는 타인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한비자는 인과 예, 덕으로 나라를 통치하면 안 된다고 했고, 마키아벨리는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상대방도 똑같이 호의를 베풀리라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이런 통치술은 자신에게 해를 가져오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판한 맥락도 같다. 군주가 덕행하면, 처벌할 사람을 처벌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범죄가 횡행하나 이를 억제할 수 없게 된다. 군주가 호의를 베풀면, 그때는 호의를 받은 민중이나 귀족은 충성을 외치지만, 군주가 위급할 때 모습을 감춘다. 결국, 군주의 덕행과 호의는, 군주의 권위를 깎아내리고 국가의 법도를 흔들어서 군주를 왕좌에서 끌어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악행을 권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반대로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성악설을 강조했다. 한비자는 권선징악을 위한 법치를 누누이 말한다. 엄격한 법치가 있고, 혹독한 형벌이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선을 권하고, 악을 누르기 위함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민중에게 막대한 폭력을 휘두를 때는 어디까지나 그 폭력이 일시적이어야 하며 그 목적이 다음에 닥칠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이 둘은 인간 본성의 이해가 선결되어야 국가와 정치를 이해할 수 있기에 성악설을 역설했다. 천사가 지상의 국가를 통치하지 않고, 하늘의 도가 천하를 지배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뤄야할 것인지가 군주가 던져야할 불멸의 질문인 것이다.  제왕학의 성악설을 민주주의에 끌어들이면 어떠한가? 인간 불신이 답인가? 아니다. 합리적 의심이라 하면 적당하다. 신뢰하되, 의심하라. 어떤 인간이라도 악하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라도, 비행하고 범행할 수 있다. 대의제에서 정치인에 대한 민주시민의 태도로 합리적 의심을 권한다. 어떤 정치인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그를 신봉하지 않는 것, 그리고 확인된 사실에 따라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이 대안이라 하겠다. 즉, 정치인에게 도덕적, 윤리적 이상론을 대입하지 않는 것이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행동하면 좋겠으나 그렇지 않을 상황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행해진 악행이 무엇을 위해 행해졌는지, 어떻게 행해졌는지 판단하는 것이 정치인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이다.  다음으로 민주시민에 대한 민주시민의 태도는 무엇이 좋겠는가? 역시나 합리적 의심이다. 공리를 말하는 민주시민의 발언을 경청하라. 그리고 신중히 판단하라. 사(私)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을 이르고, 공(公)은 그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사람이 공의를 논하면서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지를 항상 살펴보고 경계해야 할 따름이다. 성악설에 예외가 없으므로 자신도 정치인의 상황에서, 혹은 다른 민주시민의 상황에서 그리 행동하지는 않을 것인지를 숙고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고 하면서 비행과 범죄를 용서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에서 성악설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해야 부분은 참정이다. 인간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정치가 타락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정치를 외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시민이 제일 경계해야 하는 태도다. 군주가 신하에게서 스스로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것만큼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군주가 모든 권한을 신하에게 넘겨준 것으로 신하가 국가를 주무르고 전횡하다 나라가 망한 다음에야 참정하지 않는 대가를 보게 될 것이다. 성악설은 인간 본성이 악하므로, 악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치에서 누구보다도 군주의 부릅뜬 눈이, 활짝 열린 귀가 필요하다고, 바짝 차린 정신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본론, 정치적 행동주의 : 어떻게 정치할 것인가? 인간과 정치의 본성을 이해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정치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덕성을 강조한다. 바로 비르투(Virtu)와 프루덴차(Prudenzia)다. 비르투는 군주의 주체적 의지고 프루덴차는 실천적 이성을 뜻한다. 군주는 행동할 기회, 혹은 행동해야 하는 때를 포착하는 지성을 갖추는 동시에 필요한 행동을 신속하고 맹렬하게 해낼 수 있는 의지를 갖춰야 함을 이른다. 네세시타(Necessita)를 인지함은 당연하다. 네세시타는 불가피성으로,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한다. 네세시타를 온전히 인식하여 군주는 비르투를 휘두르면서 선택의지를 불태우고, 프루덴챠로 적절한 선택지를 골라가면서 통치권를 굳건히 한다.  특히나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귀족의 환심을 사기보다, 민중의 환심을 사는 게 낫다고 했다. 귀족과 척지고 살 수 있어도, 민중을 등지고 목숨을 부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튼튼한 요새는 민중의 지지라,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주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롭다. 외적을 들이닥칠 때, 민중이 일치단결하여 무장하여 도시와 군주를 사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단지, 민중을 과신하여 귀족으로부터 오는 암살의 위협을 무시하는 등, 우둔한 행위로 죽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다.  한비자는 무엇을 논하는가? 법치다. 군주의 제왕학은 법(法)과 술(術), 그리고 세(勢)를 빼고 논할 수 없다. 법이란 무엇인가. 신하와 백성의 사익 추구를 억제하고, 국가의 공익을 우선하는 원칙이다. 술이란 무엇인가. 신하를 적절하게 조종하고, 군주를 충실히 보필하게 하는 인사정책이다. 세란 무엇인가. 군주만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권세다. 법, 술, 세 모두를 갖춰야 군주는 천하를 온전히 통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법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형벌과 포상이다. 군주가 양손에 하나씩 쥐어야 하는 칼자루를 상과 벌이라 이른다. 신하에게 상을 내리고, 벌을 주는 것은 온전히 군주의 몫이다. 만일, 이런 칼자루를 신하에게 주거나 내버린다면, 군주의 위세는 훼손되고, 종국에는 신하가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노는 꼴이 된다. 술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의심이고, 소통이며, 상벌이었다. 군주가 멋대로 용인(用人)하지 않고, 법도에 따라서, 원칙에 따라 행하는 것이 술이다. 세는 무엇인가? 군주가 군주로서 갖춰야 할 위엄이다. 지위와 권세, 그리고 위엄이 바로 잡히면 군주는 군림할 수 있다. 세를 잃으면, 군주는 가벼워지고 쫓겨난다.  한비와 마키아벨리의 실천사상을 민주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적극적 민주시민의 자세다. 정치적 현실을 직시하고, 다른 시민과 정치인과 소통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 행동을 옮기는 것이다. 군주가 신하를 경청하지 않고, 소통하지 아니하니 신하는 형벌을 두려워 않고 날뛰었다. 앞에서 정의를 말하면서 뒤에서 사리를 탐했다. 이렇게 법이 무너졌다. 군주가 상과 벌이라는 칼자루를 휘두를 수 없으니 신하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고위관직에 자격 없고, 능력 없는 자가 파벌의 덕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렇게 술이 꺼졌다. 군주가 침묵하니, 신하는 군주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게 세가 사라졌다. 법과 술, 세를 잃은 군주의 말로는, 금년도의 우리 모습이다.  다행스럽게 민주정치의 군주는 비르투를 갖고 있었다. 스스로 왕 된 자라는, 주권자라는 의식을 갖고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간신배에게 벌을 줬다.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프루덴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함에 깨닫고, 지금이 아니라면 망국과 폐위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네서시티를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진즉에 네서시티와 프루덴챠, 비르투를 갖고 법, 술, 세를 행했다면, 지금 같은 재앙을 맞이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작금의 실정은 민주정치의 군주가, 곧 시민이 상벌의 유일권한을 신하에게 양도하고,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혹은 신하가 그렇게 하는 등으로 비르투와 프루덴챠를 사용하지 못한, 혹은 사용하지 않았던 대가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필연적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 번째 본론, 정치적 제도 : 무엇으로 정치할 것인가? 마지막이다. 한비와 마키아벨리의 제왕학이 묻는 화두는 그렇다면, 정치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다. 민주시민이 군주로서 갖춰야할 정치적 현실주의와 실천주의를 충분히 알았다면,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제왕학이 실현되는지를 물어야 함이 옳다. 그 수단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법치주의다. 제도주의다.  한비자는 법이 군주가 가져야할 통치의 수단이라고 한다. 법은 공의를 위한 것이므로 사리를 누른다. 짧은 시간이나마 사리가 눌러지면서, 그로 인하여 곤궁해지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혈연과 지연으로 관직에 올랐던 자, 정당하지 않는 부를 취한 자, 받아야 할 벌을 피한 자, 그리고 받지 못할 상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의가 천하에 흐르게 되면서 누구나 잘 살 수 있게 된다. 능력과 재주에 따라 일하니 상벌이 바로서고, 남을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않고도 누릴 것을 당연히 누린다. 그렇게 국가가 부유해지니 군대가 강력해지고, 주변국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고, 생산되는 재화를 필요한 만큼 거두어 남는 부분을 백성에게 되돌린다. 정책을 만드는 관료가, 신하가 국고를 탐내지 않고 녹봉을 받으며 성실히 정무를 집행한다. 이것이 바로 법이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동시에 군주가 휘둘러야 할 칼인 이유다. 법가사상이 극에 달했을 때, 진나라 왕은 천하통일이라는 위업을 일궈냈고, 시황제라는 불멸의 칭호를 얻었다.  마키아벨리는 민중과 귀족이 다른 본성을 지녔다고 지적한다. 민중은 귀족으로부터 억압받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고, 귀족은 민중을 억압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다른 본성의 신분이 갈등하면서 정국이 역동적이게 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왜 그런가? 귀족과 민중의 이익은 서로 다른 것이라, 어느 한쪽이 득세하게 되면, 국가는 착취와 억압의 수단이 된다. 귀족이 득세하면, 민중은 가난해지고, 나라가 약해진다. 민중이 득세하면 법도가 스러지고 질서가 무너지고, 나라가 약해진다. 그래서 군주는 이 두 신분의 본성을 적절히 조율하여 역동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두 신분이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이상,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결국 두 신분이 합의할 수 있는 범위는, 모두를 위한 법률과 통치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공익으로 이어진다. 이런 공익을 창출하여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군주는 비르투를 갖춰야 한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갈등의 제도화를 논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제도주의는 외견상 상극으로 보인다. 공존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둘의 본질을 파악하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공존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군주는 시민이고, 군주의 통치수단은 법치가 되어야 함이다. 만일, 민주주의라도 법도와 질서가 바로 서지 않는다면, 곧 ‘다수의 전제정’과 진배없다. 시민이 좋은 대로 법률을 제정하고, 판단하고, 폐지한다면 국가에 혼란만 가득할 것이고, 망국이 닥칠 것이다. 반대로 법치주의만 서고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면, 그 법은 공익을 위하지 않고, 단순히 개인을 억압하는 도구로서 역할을 다 할 것이다. 군주정과 귀족정의 법치주의는 보통, 질서 유지의 수단과 지배세력의 기득권 유지에 봉사하는 제도기 때문이다. 결국, 목적과 수단에서도 두 제도는 상호보완적이라는 말이다.  제왕학의 민주주의적 재해석이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화를 일컫는다. 군주정이었던 시절, 통치술과 군주론, 제왕학은 민중을 억압하고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법치주의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런데 민주정이 들어서면서, 제왕학은 민주 시민의 교양이며 덕성이 되었다. 관료, 공무원을 어떻게 통제하고 사용할 것인지 그 방법과 기술을 터득하고, 임금으로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려주는 것이다. 그 통치술의 실현을 위해 법치가 필요하고, 제도가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군주가 혼자이던 때, 아무리 한비가 도를 비추어 보아 올바른 법을 세울 것을 누누이 강조했으나, 일개 인간이 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진시황 이후, 2대 황제가 통치에 실패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민주정에서 모두가 군주이니, 모두가 지혜와 능력을 모아 올바른 법도를 세우기가 그만큼 편리해졌다.  본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과 정치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우선이다. 정치에 멋대로 도덕적 이상관을 주입하고, 정치인에게 선행과 호의를 기대하지 말라. 훌륭한 군주는 신하가 복종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놓고 충성을 받는다. 종횡할 수 없도록 해놓고 신하에게 종횡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래야 법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적으로 행동하라. 군주는 쉬지 않는다. 끝없이 신하를 살피고, 천하를 굽어보며 공리를 위한다. 놀고먹고, 쉬고 자기에 바쁜 군주는 곧 왕좌를 찬탈당할 것이다. 셋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조화할 수 있도록 한다.      결론, 애국자의 제왕학  잠시, 한비와 마키아벨리의 신상(身上)을 밝혀본다. 한비는 춘추전국시대의 칠웅 중 일국이었던 한(漢)의 귀족가문의 공자였다. 한비자는 한나라 왕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내용은 일관적이었다. 법치였다. 한나라가 당시 칠웅 중 약소국이었기에 주변국에게 수탈당하고, 무시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울분을 토하며 「한비자」를 저술했다. 올바른 말을 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서 한비자는 절망했지만, 그 절망에서 주저앉지 않고 「한비자」를 남긴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15-16세기, 혼란스러웠던 이탈리아 정세에서 조국 피렌체를 위해 헌신했던 서민 출신의 관료였다. 이탈리아에 에스파냐, 프랑스라는 강력한 외세가 들이닥치고, 교황청과 여러 도시국가가 분열하여 상잔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조국 피렌체의 평화를 희망하고 이탈리아의 자주독립을 꿈꿨다. 이탈리아에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보고,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능력을 총동원하여 만든 걸작이「군주론」이다. 에스파냐가 피렌체를 점령하면서 메디치 가문이 돌아오고, 마키아벨리는 파직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누명으로 고문을 받았다. 범인(凡人)이라면,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대로 정신이 무너졌겠지만, 마키아벨리는 굴하지 않고 「군주론」을 저술했다. 역작으로 복직을 꿈꿨으나, 그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들의 말로는 어떠했는가? 한비는 진나라에 끌려간다.「한비자」를 읽고 감탄했던 진시황이 그와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은 한비와 정치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원했으나, 한비는 진나라를 쇠약하게 하고 한나라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충심에 진시황에게 거짓된 조언을 준다. 결국, 한비는 같이 스승 순자 밑에서 동문수학했던 객경(客卿) 이사(李斯)에게 독살된다.  마키아벨리는 어떠한가? 복직이 실패함에도, 마키아벨리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희곡 만드라골라를 쓰면서 시민의 신분으로 꿋꿋이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러면서도 복직의 꿈을 놓지 않고 정세를 계속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본다. 에스파냐가 물러남에 따라 메디치 가문도 무너지면서, 피렌체의 신(新) 공화정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반려된다. 복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며칠 뒤 마키아벨리는 복통으로 급사한다.  한비와 마키아벨리의 삶을 훑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살아있을 당시, 정국과 시류에 휩쓸려 국가에 원하는 만큼 봉사하지 못했으나 부국강병책을 제언하고, 실행하려 노력했다. 왜 그런가? 그들이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한비와 마키아벨리는 어디까지나 조국의 번영과 부귀를 위하여 제왕학을 논했다. 제왕학의 기본은 바로 애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논하는 애국은, 결코 통치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현 정책을 맹신하는 것도 아니다. 한비와 마키아벨리가 말한, 제왕학의 기저에 깔린 애국은, 옳은 말이라면 설사 그것이 말하기 괴롭더라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옳은 말이라면 설사 그것이 듣기 힘들더라도 들을 수 있는 용기다. 애국은, 옳은 것과 좋은 것 중에서 옳은 것을 고르고, 따르는 것이다. 옳은 것을 선택한 결과가 더 좋은 것이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말이다. 애국은, 나라를 위하여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이다. 이런 애국을 바탕으로 민주시민 모두가 제왕학을 실천한다면, 어느 나라든 간에 부국강병을 이루고 천하태평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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