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역사는-특히 한국, 중국, 일본-유럽이 몇 백년에 걸쳐 이룩한 모든 일들과 역사적인 사건을 단 50년이라는 시간으로 압축해버렸다. 그래서 거기에 따른 부작용도 50년동안 끊이질않고 일어났다. 마치 풍선속에 바람을 너무 많이 넣어서 곧 터질 것 같은데 이 문제의 바람을 계속 집어넣어 위기의 순간까지 이끌린 것처럼 아시아는 곧 터질 풍선과도 같은 문화적 충격과 거기에 따른 인간적인 삶의 가치의 혼란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것을 제일 단적으로 보여준 소설은 많았지만 형제처럼 재미있게 풀어낸 소설도 드물다. 보통의 소설은 직설적으로 우리네 위기를 말하거나 무거운 필기체를 지향했지만, 형제는 역시 위화의 소설답게 그것이 50년대에 걸친 역사적 간극의 비판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런 티가 나질않는 순수한 소설같이 느껴졌다. 위화의 필체는 거짓 비슷비슷하고 들어가는 욕이나 케릭터에서 풍기는 느낌도 비슷하지만 이 소설이 ‘허삼관 매혈기’와 다른 점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 삶의 슬픈 끝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따른 인간적 반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위화라는 소설가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바로 인간적인 반성을 보여주는 문장에서조차 읽는 독자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광두의 반성은 문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글을 읽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찾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위화가 독자를 위해 남겨둔 배려이자 선물이었던 것이다. 솔제니친이나 체홉처럼 정말 경쾌하게 글을 써내려가는 대륙의 작가 위화. 분명 어두워야 할 부분에서도 전혀 그렇지가 않다. 반대로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괜찮은 척 경쾌하게 써내려가서 더 슬프게 만드는 작가. 모든 소설이 비슷한 것 같지만 읽고 난 뒤의 그 깊이를 되새기면 각각의 소설이 전혀 다른 맛을 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작가. 아. 나는 위화가 너무 좋다. 중국 소설의 특징이 특정한 인물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해나가는 경향이 짙어 다소 지루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위화같은 작가만 있다면 그 어떤 소설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위화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