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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010806s2001 ulka 000 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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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6 a332.2323
100 aHochschild, Arlie Russell
245 00 a(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d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e백영미 옮김
260 a서울 :b아침이슬,c2001
300 a349 p. :b삽도 ;c23 cm
500 00 b맞벌이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
507 t(The) second shift
653 a돈a여자a밥a남자aSECONDaSHIFT
700 1 a백영미
900 a혹실드, 알리 러셀
950 0 b\9800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종류
단행본 동양서
서명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저자명
발행사항
서울 : 아침이슬 2001
형태사항
349 p : 삽도 ; 23 cm
주기사항
맞벌이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
ISBN

소장정보

청구기호 : 332.23 혹58밥
도서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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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6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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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인문사회자료실(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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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불가 (소장처별 대출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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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6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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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별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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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6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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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별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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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보존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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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2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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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별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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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대보존서고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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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1026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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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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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아인 서평

Hochschild, Arlie Russell
이진영
2020-12-18
  분명히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여성 세대를 지나, 이제는 각자의 이유로 직장에 다니는 세대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어머니의 통상적인 이미지는 전자의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자녀를 감싸 주는 어머니. 자기소개서의 고정 문구만 봐도, ‘저는 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로 시작하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우리에게 집안일은 어머니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우리 집의 경우만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을 하지만 아버지는 집안일에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 결국 설거지나 빨래 같은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의 몫이 되어, 어머니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어머니의 이중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가끔 ‘도와’ 주지 않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어머니가 노동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타지에 살아 스트레스에 기여하지 않는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나의 것만이 아닐 것이다. 책에 나오는 여러 쌍의 부부들이 가사 분담에 대한 의견 충돌로 위기를 겪고 있다. 까마득하게 오랜 시간 동안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3~40년 전의 사례와 오늘날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절망적인 일이다. 세상이 바뀌는 동안 남녀 간 성 인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문제의 이유를 일차적으로 직장에게 묻고 싶다. 직장은 과거의 성 인식을 그대로 담습한 채 가정 문화를 희생시키며 확장된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직장은 아직도 남성만이 유일한 가정 경제 원동력인 것처럼 남성에게 맞춘 시스템을 고집한다. 남녀 채용 비율의 차이, 유리 천장, 육아 휴직을 쓰는 여성을 바라보는 분위기는 여성을 집안으로 밀어 넣는데 일조한다. 결국 이러한 현실적 벽에 부딪친 일부 여성들은 직장을 다니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전통적인 여성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차적으로, 그리고 나의 사례에서도 언급했듯 개인의 머릿속에 굳어진 성 인식 또한 문제가 된다. 과거처럼 남성만이 직장을 다닐 경우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날 남성과 여성 모두 직장에 다니는 비율이 높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는 평등주의적 사고를 가진 여성들은 남편에게 가사 분담을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개 완강한 거부이거나 허울뿐인 분담이다. 설거지, 빨래, 청소 등 일상적인 일들은 계속해서 여성의 몫이기에, 여성이 바라는 실질적인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여성은 직장과 가정 양쪽에서 이중 노동의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성별에 따라 역할이 다르게 부여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통상적 성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받는 지적을 못 견뎌 했다. ‘여자애가~’ 로 시작하는 지적은 내가 가장 잘 반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건 여성으로서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남동생은 제때 방 청소를 하지 않는다고 ‘남자애가 왜 이렇게 지저분하니?’ 라는 지적을 듣지도 않았고, 명절에 음식을 만드는 일을 돕지 않는다고 ‘나중에 장가 어떻게 가려고 그래?’ 라는 핀잔을 듣지도 않았다. 내가 자란 가정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구시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라며 남성과 여성을 나눴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는 전제는 나에겐 진리와 같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봐 온 집안의 결혼한 여성들은 요리, 청소, 빨래, 육아 등 모든 집안일을 혼자 감당해야만 했고, 가끔 통상적인 남성적 특징을 보이면 곧바로 지적받았다. 개인적인 가치관과 현실의 가치는 충돌했고, 나는 자연스레 결혼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만약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낸시와 같은 평등주의적 입장을 취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도 지적했듯 낸시의 행동은 그녀의 페미니스트적 입장을 뒷받침하기에는 허술한 부분이 많다. 에반은 과도기적 남성으로 명명되지만 전통적 입장을 가지고 살아온 나날이 더 많다. 하지만 낸시는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만 앞서 급진적인 가사 분담을 주장했다. 2018년의 시각에서 봐도 숨이 막히는 요일에 따른 가사 분담 계획표는 에반의 입장에서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낸시는 파격적인 시도를 몇 번 해 본 후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함으로써 가정의 평화를 얻어냈다. 그녀가 불공평한 가사 분담을 하면서도 이전에 비해 만족하는 것은 앞서 말했던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위층과 아래층을 나눔으로써 가사 분담을 이뤘고 이전에 비해 평등해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여성은 일상적인 가사 일을 하고 남성은 비일상적인 가사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전통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평등주의의 탈을 써 개선할 기회도 앗아갔다는 점에서 이들 부부의 가사 분담 실태는 전통주의보다도 하위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평등주의적 입장을 가진 나로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부는 카르멘과 프랭크 부부였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 갈등은 항상 성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앞서 이야기한 낸시와 에반처럼 ‘가사 분담을 원하는 아내와 저항하는 남편’ 의 역할이 가사 분담 갈등에서 고정적인 전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 이데올로기가 전통적 입장으로 일치함에도 이들 부부는 경제적 현실과의 갈등을 겪는다. 각자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카르멘은 직장에 다녔고 프랭크는 가사를 분담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들이, 나아가 내가 원하는 바람직한 맞벌이 부부의 모습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카르멘 스스로가 프랭크보다 ‘열등한’ 것에 만족하고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계산된 무능함을 발휘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은 남성을 보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대는 변해 가고 있고 여성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자유롭게 구직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나는 매체에서 다뤄지는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선호하고 선망한다. 그래서, 남성의 도움 없이 주체적으로 할 일을 찾아 떠나는 신여성의 모습과 대비되는 니나의 입장이 더욱 더 안타까웠다. 물론 피터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능력 있는 아내를 가진 것은 가부장적인 당시 시대 분위기에 비추어 봤을 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모습은 분명 신남성 신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피터의 가치관은 성 혁명이 불러온 변화에 심각하게 뒤처져 있었다. 피터는 사회가 변화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내가 자신보다 능력 있음을 참아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니나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뻔뻔하기까지 한 생각에 동의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다가 후일 육아를 위해 애정 가득했던 커리어를 포기한다. 나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를 느꼈지만, 당시의 가부장적 분위기에서는 그녀의 희생은 감사하기보다는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딸의 선생님이 보낸 쪽지에서 이 ‘희생’ 의 의미가 극대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학생의 문제를 학생의 부모에게 알릴 때 ‘어머니’ 만을 언급했다. 이는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가족 치료를 받기로 결정하는 것은 니나이고, 피터는 곁에서 위로하는 역할에 국한된다는 것을 은연 중에 암시한다. 당시,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고 해도 아이의 문제는 부모의 몫이 아니라 온전히 여성만의 몫으로 치부되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깊게 뿌리내린 성 역할 인식으로 인해 직장 여성은 일과 가정 모두에게서 손가락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부부는 대개 가사를 얼마나 공평하게 분담하는가에 따라 만족도가 결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나라 남편들이 로버트 정도의 성 의식을 갖고 있다면 틀림없이 많은 아내들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는 깨어 있는 남성이다. 아내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가사일을 돕고, 아내가 자신보다 능력 있는 것에 자격지심을 느끼지도 않는다. 딸에게 인형 대신 기차를 가지고 놀라고 말하는 대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딸이 잔디를 깎거나 운전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에반과 동시대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진보적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로버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기차를 가지고 놀고 일을 하러 나가라며 딸과 아내에게 기존의 남성적 특성을 허락했지만, 로버트 자신은 집안일과 같은 여성적 특성에 편입되지 못한 것이다. 여성에게 통상적인 남성적 역할을 허용했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 통상적인 여성의 역할을 다하도록 강조하는 것. 이러한 생각은 이중적이지만, 전통주의를 벗어나 진보주의와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기도 하다. 나는 로버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남성을 알고 있다. 여든이 넘으신 친할아버지는 밥상을 차리는 것은 오로지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밥상을 차릴 때, 당신은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옆에 앉아 있는 열 살의 어린 손녀에게 상 차리는 것을 도우라고 지적하신다. 하지만 동시에 할아버지는 세상이 바뀌었으니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나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쌈짓돈을 푸셨다. 이러한 남성의 모습은 전통적인 걸까? 진보적인 걸까? 아니면 과도기적인 걸까? 사실 명확히 규정되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친할아버지가 살아온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봤을 때 이러한 태도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안고 살아온 전통주의의 영향 아래서 ‘여성의 교육 필요성’ 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가치를 습득하고 당신의 삶에 적용했다는 것은 희망적인 진보적 변화의 한 부분이다. 또한, 대부분의 가사일을 가정부에게 맡기고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은 현대 맞벌이 부부의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부부들은 가사보다는 육아를 좋아한다. 가사는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며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 이고, 육아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를 보살피고 돌본다는 점에서 가사보다는 비교적 ‘놀이’ 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가사 육아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부에게만 한정되겠지만, 부부 간 감정이 상하지 않으며 가사 분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으면 불행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이 돈 있는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거나 돈 없는 사람들의 질투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제시카와 세스 부부의 사례를 봤을 때 이 말은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부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세스는 돈과 지위가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를 상쇄시킬 만한 힘을 가진다고 말하며 자신의 일 중독을 합리화했고, 제시카는 아이들을 위해 일을 줄이고 남편을 가사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하다가 끝내 가사와 육아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겨져 상처받은 것은 아이들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만한 비극이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나는 비극에 영향을 끼친 요인 중 하나가 돈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부부가 조금 더 낮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분명 그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을 고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용한 사람들이 기존에 수행했던 일들은 자연스레 부부의 일이 되었을 것이었으며, 세스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공간을 일터에서 가정으로 변경했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바쁜 부부들이 가사와 육아를 대체하는 서비스를 발전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서비스는 일하는 부모들의 편의를 충족시켜 주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한편으론 부부에게서 아이가 방치되는 걸 쉽게 만들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엄마는 탁아 교사에게, 탁아 교사는 아이에게 자신의 의무를 맡기고, 결국 남은 아이는 필연적으로 지나치게 조숙해질 수밖에 없다.    씁쓸하지만,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일하거나 더 많이 일하고도 남성보다 못한 처우를 받는다. 그럼에도 여성은 경제적 불안감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 일해야 한다. 그녀의 직업 활동이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아니타와 나의 어머니는 유사성을 가진다. 자신만의 주방을 갖고 싶어하는 아니타와 아이를 좋아하는 어머니는 공통적으로 전통주의 여성의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두 여성 모두 정체성 탐구가 아닌 경제적 조건을 이유로 들어 여성도 직업 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아니타와 비슷한 맥락에서, ‘여성도 일을 해야 남편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 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일을 시작할 무렵의 아버지는 레이와 반대의 입장이었다. 아버지는 레이처럼 가장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 애쓰며 어머니의 구직 활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는 주체가 아니라 세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절대적인 돈의 양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신 후,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에서 놀다가 일을 하게 되어 좋다’ 며 만족하셨다. 아니타가 기대한 구직 이후 배우자의 존중이 나타난 것이다. 조금 딴 얘기지만, 사실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논다’ 라는 말의 의미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얼마 전 한 교양 과목 수업에서 전업 주부의 연봉을 계산해 보았다. 최저시급, 주휴수당, 명절 보너스 두 번만을 포함한 간소한 계산이었으나, 연봉 4500만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놀라운 것은 4500만원이라는 결과가 분반 전체에서 가장 낮은 값이었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가사 분담을 하지 않는 남성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최소 4500만원 이상의 노동을 하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    여기 가사 분담을 하려는 의지를 가진 부부가 있다. 그들은 경제적 조건도 갖췄고 성 이데올로기적 조건도 일치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 여성은 남성보다 희생하면서도 미안해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가사 분담 갈등에서 남성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여성은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한다고 한다. 하지만 캐롤은 그렉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이비시터와 자신을 비교하며 집안일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갖는다. 이러한 부채 의식은 가사와 육아가 원래 여성의 영역이라는 구시대적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마 캐롤과 그렉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부부의 모습일 것이다. 부부들은 맞벌이를 하며 경제적으로 풍족해졌고, 성 혁명에 따른 변화로 남성들도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전파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일상적 가사 노동을 하고, 직업관을 바꾸고, 1차적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고 캐롤과 같은 부채 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이것은 단지 여성이이기에 갖게 되는 감정이다. 다시 말해, 아직 사회적 분위기는 가사와 육아가 여성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렉은 캐롤보다 덜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그렉처럼 가사를 분담하려는 의지를 가진 남성은 ‘아내의 일을 도와 주려는 바람직한 남성상’ 으로 평가된다. 캐롤은 자신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희생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여성이거나, 심지어 ‘가정적인 남편을 만난 운이 좋은 여성’ 이라고 평가된다.   불균등한 가사 분담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심리적 삼각 관계라는 갈등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나는 바바라와 존 부부의 사례를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는데, 내게 심리적 삼각 관계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에게 관심을 쏟는 부모를 보고, 큰 아이는 결핍된 애정에 따른 불만을 동생에게 표출한다. 사실 나는 이 이론이 아직 자아가 덜 형성된 어린 아이들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질투를 전제로 한다고 생각했다. 동생들이 태어났을 때의 나는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에 마냥 신났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존은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인가? 나는 존이라는 사람 자체가 유아적이고 질투가 많기보다는 가사 분담에서의 불균등에 대한 서운함이 심리적 삼각 관계를 형성하는 데 강한 촉매로써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부의 문제는 아내와 남편의 성 이데올로기가 달랐고, 갈등을 회피했다는 것에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아내는 여성인 자신만이 1차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존에게 1차 부모의 역할을 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내와 아이를 잃는 것이라는 점은 상실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바라는 여성판 로버트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로버트와 달리 바바라의 가치관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나는 이러한 결과가 성별의 차이에서 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앤의 입장에서 로버트의 가치관은 ‘감사해야 할 것’ 이다. 여성인 딸과 자신에게 남성의 특권을 주고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여성의 영역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원래는 자신이 혼자 했었어야 할 ‘여성의 일’ 을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존의 입장에서 바바라의 가치관은 ‘괘씸한 것’ 이다. 남성인 자신이 기꺼이 가사와 육아를 분담함으로써 여성의 영역에 들어가겠다고 결정했지만 그것을 막음으로써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등해졌다고 하지만 아직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에는 성적 차이로 인한 차별적 의식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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