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6・25전쟁 시기 중국군 포로의 대만송환 요인을 고찰하는 것이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 6・25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전쟁기간 동안 유엔군에 포획된 중국군 포로의 총수는 약 21,000 여 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 중 2/3이상이 자유송환의 원칙하에 자신의 고향인 중국본토를 포기하고 대만송환을 선택하였다.선행연구에서는 중국군 포로의 대만송환문제를 크게 두 가지 요인으로 분석하였다. 하나는 미군의 CIE 세뇌교육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대만정부의 개입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많은 연구자 들은 주로 외부적 변수의 작용에 집중하여 중국군 포로의 대만송환은 ‘강요된 선택’이며 대만으로 송환된 중국군 포로는 ‘이념전의 희생양’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필자도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가 중국군 포로의 대만송환선택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 자료와 수집된 구술자료 증언들을 토대로 분석해 보니 대만으로 송환된 중국군 포로 중 자신의 의지에 따라 대만 송환결정을 내렸다는 사례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대만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공산당 치하로 돌아가면 정치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외부적 요소만을 다루던 것에서 벗어나 중국군 포로의 내적 요인을 중심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이를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중국군의 참전배경, 국내의 정치운동이 중국군 포로에 끼친 영향, 그리고 중국군 포로의 내부갈등 등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중국군 포로의 대만송환에 대해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도출할 수 있었다.첫째, 중국군의 참전배경에는 자발적으로 입대한 경우가 있었지만 강제, 또는 반강제징병도 존재하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는 전쟁의 계획과 출병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국내정치의 통합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을 고려해 참전계획까지 결정하였다. 중국군의 동원과정을 살펴 보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구호 아래 자발적 으로 입대한 중국군도 있었다. 반면에 구술자료 증언을 살펴보면, 강제 혹은 반강제로 징병된 경우도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군 개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입대 동기는 서로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정치적인 이익과 관련되어 있었다.둘째, 중국국내에서 전개된 정치운동은 중국군 포로의 사상적 변화와 송환선택에 영향을 끼쳤다. 중국공산당지도부에서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국내정치를 통합하기 위하여 ‘반혁명분자진압운동(反革命分子鎮壓 運動)’, ‘토지개혁운동(土地改革運動)’, 그리고 ‘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運 動)’ 등의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치운동이 심화됨에 따라 타격을 받는 면도 갈수록 확대되었다. 중국군 가운데 ‘불결분자(不潔分子)’ 로 분류된 국민당관계자, 착취계급 출신자, 친미적인 사상을 가진 지식인 계층 등과 그들의 가족은 일부만 제외하고 대부분 정치운동에서 차별과 타격의 대상이 되었다.중요한 것은 6・25전쟁에 참전하기 전부터 일부 중국군 포로는 정치운동으로 인해 이미 타격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참전을 통해 자신의 사회성분을 상승시키고자 하였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또한 전쟁 중에 군내에서 전개된 정치운동으로 인해 본인이 타격을 받았거나 자신의 가족이 국내의 정치운동에서 숙청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중국군 포로도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탈영하여 유엔군에 귀순하였 다. 자신이 당한 타격 때문에 그들은 공산당을 증오하면서 공산당 치하로 돌아가는 것을 결사적으로 거부하였다. 한편, 일부 공산당간부출신 중국군 포로의 경우에는 공산당 정치운동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수용소 내에서 오히려 가장 단호한 반공포로로 변신하기도 하였다.셋째, 포로수용소 내에서 중국군의 내부갈등은 처음부터 존재하였고 반공포로들은 일찍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군 반공포로들은 포로수용소 초기부터 수용소에서 반공활동을 전개하며 대만으로 송환해 달라는 요구를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1951년 5월 중국군 포로는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전되면서 북한군 포로와 분리되어 수용되었다. 그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연이어 중국국민당반 공청년애국단(中國國民黨反共青年愛國團), 중국국민당63지부(中國國民黨 63支部), 반공항아애국청년동맹회(反共抗俄愛國青年同盟會) 등의 반공포 로집단을 조직하여 ‘혈서 쓰기운동(血書運動)’, ‘반공문구 문신운동(刺字 運動)’ ‘청원서 보내기운동(上書運動)’ 등의 운동을 통해 세력을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대만송환요구를 호소하기도 하였다.중국군 반공포로의 핵심세력은 국민당군대 출신자, 지식인 계층, 그리고 소수 공산당 당원 출신자들이었다. 그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지게된 원인은 공산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과 증오, 정치운동에서 본인이나 가족이 당한 숙청, 그리고 공산문화가 중국전통유교문화의 파괴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산수용소시기부터 거제도포로수용소를 거쳐 제주도 모슬포까지 대부분 중국군 포로들은 2년 넘게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그기간 중에 미군은 수차례의 심문과 선별작업을 실시하였는데 선별의 결과는 매번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대만으로 송환된 14,000 여명의 중국군 포로가 모두 하나의 요인으로 대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고찰해 보았을때 중국 국내에서 전개된 급진적인 정치운동이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정치운동으로 이미 타격을 받게 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지게 된 포로는 포로수용소에서 적극적인 반공 활동을 전개하였다. 포로 신분으로 본국으로 송환되게 되면 정치운동에서 타격을 받을까봐 공산당체제를 두려워하게 된 자는 이에 동참하였다. 2/3를 넘는 중국군 포로들이 본국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송환을 선택하게 된원인을 외부환경에서 강요된 결과로만 보고 중국군 반공포로의 내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本論文探討了6・25戰爭時期中國人民志願軍俘虜臺灣遣返的原因。戰爭期間共有21,000余名志願軍或被俘,或主動向聯合國軍投降,投誠。戰爭結束後,雙方同意對俘虜進行志願遣返,超過2/3的志願軍選擇了臺灣。既往研究對這一現象主要從CIE洗腦教育,以及臺灣方面間諜的侵入等兩方面入手進行分析。大多數研究者將這一結果歸咎為外部因素的作用,即志願軍俘虜的臺灣遣返結果是一個‘被強迫的結果’,是冷戰時期意識形態鬥爭的 ‘犧牲品’.外部因素無疑對志願軍的遣返選擇存在影響,這一點不可否認。但通過對相關史料的挖掘以及口述史的整理,多數志願軍俘虜在選擇遣返地的問題上,主張本人是按照自己個人意願遣返的。而遣臺志願軍俘虜的則是主張自己的選擇是建立在一個基礎的判斷之上,即若以俘虜的身份回到共產黨統治下,他們會遭政治運動之打擊。因此,在志願軍俘虜主動選擇遣返至臺灣這個問題上,有必要從志願軍俘虜的內在因素出發進行分析與解釋。因此本論文從志願軍的參戰背景,國內政治運動對志願軍俘虜的影響,以及志願軍俘虜內部矛盾等問題出發,考察 此問題。第一,從志願軍的參戰背景來看,雖然參戰當時湧現出了許多志願參軍的典型,但半強制參軍,甚至強制性參軍現象仍然存在。為了盡快穩定政局,整頓社會經濟秩序,肅清國內反對勢力,中國政府還是先後動員了約240萬兵力。通過對志願軍動員相關史料與口述史的整理,我們可以發現,在“抗美援朝,保家衛國”的口號下,雖然湧現了許多自願入伍的青年,但幾乎所有的遣臺志願軍反共俘虜均在參訪中表示,自己是非主動入伍的。而從志願軍的入伍動機來看,通過參軍來實現政治上,以及經濟上的利益是主要目的。第二,中國國內大規模開展的政治運動對志願軍俘虜的意識形態產生了相當深刻的影響。為了肅清反對力量,重塑政治秩序,中國共產黨在參戰的同時,又大規模發動反革命分子鎮壓運動,土地革命運動,抗美援朝運動等政治運動。隨著政權的不斷鞏固,這些運動逐漸顯示出激進化傾向,運動中的受挫面也不斷擴大。在志願軍中,國民黨有關人員(國民黨黨員, 民黨軍隊出身人員,國民黨政府官僚等),剝削階級(地主,富農,資本家,小商人等),以及走親美路線的只是分子階層都屬於不潔分子,這些人與他們的家 屬都是政治運動打擊的對象。一部分志願軍俘虜在參戰之前,已經在政治運動中被肅清。為了在新社會中立足,他們希望通過參戰來提高自己的社會成份,這個願望隨著政治運動的不斷深化最終落空了。還有一部分志願軍在參戰過程中被肅清,或得知其家屬被肅清的消息。為了保存自己的性命,一小部分被肅清的志願軍選擇主動脫逃,歸順聯合國軍。這些人因為自身遭遇反對回國。還有一部分共產黨 幹部由於熟知共產黨的運營模式,在俘虜營中反而選擇不遣返。第三,反共俘虜從釜山俘虜營時期就掌握了俘虜營中的主動權,要求將遣返臺灣。這與戰爭初期志願軍俘虜中投降或歸順聯合國軍者居多有關。1951年5月志願軍俘虜從釜山遷往巨濟島以後,與北韓人民軍俘虜分開收容。反共俘虜此時在俘虜營中先後成立了中國國民黨反共青年愛國團,中國國民黨63 支部,反共抗俄愛國青年同盟會等俘虜組織,並展開了寫血書運動,刺字運 動以及上書運動等。另一方面,俘虜營中也存在親共俘虜以及親共俘虜組織。隨著停戰談判的不斷深入進行,俘虜營中反共俘虜與親共俘虜之間的鬥爭也愈演愈烈。為了準備遣返俘虜,1952年4月美軍對俘虜營中的志願軍俘虜進行了一次甄別,甄別前夕志願軍俘虜營中發生流血事件,流血事件對誌願軍俘虜的選擇存在一定影響。志願軍俘虜在俘虜營中度過大約兩年的時間。在這個過程中,美軍對志願軍進行了數次調查與甄別活動,但甄別結果與最後俘虜遣返結果相差不大。其中,反共俘虜核心勢力由國民黨軍隊出身者。知識分子以及部分共產黨員組成,還有一部分俘虜本隊共產黨政權並無認識,通過在俘虜營中的耳儒目染,認爲若被遣返,必將遭到嚴懲,因此選擇了拒絕遣返大陸。美軍管理以及臺灣勢力介入也對志願軍俘虜的選擇存在影響,但就CIE教員的人數以及國 民黨政府介入俘虜問題的時間來看,這些影響並不是決定性的。誠然,14,000余名志願軍俘虜選擇遣送臺灣的原因因人而異,各有不同。但從整體上來看, 中國國內展開的政治運動無疑是造成大批志願軍選擇遣返至臺灣的最大因素。已在政治運動被肅清的俘虜成為堅定的反共俘虜,而擔心俘虜身份遣返大陸後,會變成被肅清對象的俘虜也逐漸成為了反共俘虜的一 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