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州 女眞族은 중국 동북 지역의 유목민족 중 하나로, 16세기에 豆滿江, 輝發江 유역 상류 지역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 영토 범위는 婆豬江, 蘇子河 등 산림지대에 위치해서 수자원, 산림자원이 풍부하다. 이 때문에 어획, 채집 등은 여진인들의 주요 생활방식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13개의 갑옷으로 출병하여 건주 여진은 동북 지역에서 6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시작했다.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으로 건주 여진부락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그에 따라 식량 수요 역시 증가했으며, 기존의 채집과 사냥한 생활 방식을 사용하면 비대해지는 부족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전쟁을 통하여 약탈한 포로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원래 건주 여진족의 노동력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둔전과 개간은 누르하치 시기에 주요 정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누르하치 시기에는 牛錄屯田, 計丁授田, 分丁編莊 등 농업정책을 잇따라 내놓았는데 이런 정책들은 모두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경지 면적을 늘리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萬曆 42년(1613년)부터 청나라가 입관하기 전까지 경작지의 획득이 전리품 약탈의 주요 내용이 됐다. 농업경제는 여진사회의 주요 경제형태가 되기를 시작했다.天命 6년(1621년)의 計丁授田 정책은 만주족이 遼東 지역에서 경영한 주요 농업 정책 중의 하나이다. 우선 遼東에 들어가고 주인이 없는 황무지를 대거 점령한 여진족이 計丁授田의 방식으로 토지를 여진 병사들에게 분배했다. 한인과 “同吃同住同耕”의 정책을 통하여 만주족이 정착생활이 가능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향후 만주족과 한인 사이에 갈등이 야기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전쟁에 필요한 양식이 부족해서 한인을 상대로 계정수전 정책을 시행했다. 이 토지점거 정책은 다른 민족끼리 같이 거주하는 경우 분란이 일어나가 쉽다는 가능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天命 10년(1625년) 한인들의 폭동을 초래하였다. 이에 새로이 분정편장 정책이 등장하였다. 이 분정편장 정책은 滿·漢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위기가 심각해져서 만·한 거주지를 직접 분리하고, 한인관원은 한인을 관리하도록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이 마련되었다. 1644년 청의 入關 이후, 八旗兵丁을 배치하기 위해 계정수전정책과 유사한 圈地정책을 시행하여 분배원칙과 분배수량이 유사한 방안을 채택했다. 다만 권지정책에서 滿漢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거주지를 분리시키고 각자 자기의 사무를 관리하며 권지 범위도 명확히 하고 분배 원칙을 합리화하는 등 '計丁授田' 내용보다 보완된 점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만주족 사료를 근거로 권지 정책의 수립과 후금의 권지행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누르하치 시기의 계정수전 정책과 분정편장 정책을 분석하여 順治 연간 권지 정책과 대비함으로써 청나라 초기 입관을 전후한 농업정책 간의 계승 발전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