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文主要对蛟山许筠(1569~1618)和卓吾李贽(1527~1602)的开放意识进行了比较研究。所谓的开放意识,即在态度,思想意识等层面上不受其他因素的束缚,与闭塞相对立的一种对外开放的状态。许筠和李贽的思想与同时代的儒学者相比,展现出了很强烈的进步性和开放性。 许筠和李贽所处的16世纪,对于当时的文人而言儒教是他们一生的信念。与他们所不同的,许筠和李贽没有一味的盲目追崇儒教,反倒对佛教,道教,天主教等其他宗教更感兴趣,因此他们的思想在当时而言可谓社会的“异端”思想,他们也因此被安上了“儒教叛徒”的头衔。而本文就对他们的此‘异端’思想进行了比较研究。但是“异端”本身偏贬义,所以本文选用了更偏褒义的“开放”这个词来形容他们的思想。 许筠是韩国最初的国文小说《洪吉童传》的作者,也因此他在韩国的文学史上占据非常重要的地位。所以迄今为止有关许筠的研究论文主要倾注于对他的《洪吉童传》等文学方面的研究,相反对于他的开放意识研究微乎其微。有关许筠的开放意识的研究论文中,仅仅局限在许筠是否受李贽影响的层面上,并没有对他们的思想进行深入的比较研究,这便是本论文开始的契机。 迄今为止对于许筠和李贽的比较研究,主要以李家源的研究成果为依据。李家源在他的论文中将许筠比喻成“朝鲜的李贽”。所以至今为止的研究中主要都着眼于李家源的观点,几乎都是在比较两个人的共同点,即为什么许筠被称为朝鲜的李贽。所以算不上比较研究。因此基于先行研究,本文首先对二人思想形成的背景进行了考察,即他们所处的当时的社会背景及家庭背景。其次通过对于人欲和女性才能的肯定两个层面对他们的开放意识进行了比较研究。比较研究的结果如下: 第一,生长环境,许筠12岁的时候父亲去世,李贽很小的时候母亲去世,二人都算是单亲家庭成长的,在此层面上可谓相似。但不同的是,许筠的家族可谓名门望族,而李贽则是当时身份极其卑微的商人家族出身。即使有如此悬殊的身份差异,二人所处的不同的成长环境导致他们表现出与常人不同的不受外界束缚,倔强孤傲的性格。也都因此性格招致了儒学者的批判和迫害,最终许筠受极刑处罚,而李贽则在狱中自杀。 第二,都肯定人性欲望,并主张人应该随心所欲,即随本性和欲望生活。但是在男女情欲的层面上,许筠的观念里女性还是属于男性的附属品,即男性还是占据主导地位;相反,李贽主张女性婚姻自由,同时还支持寡妇再嫁,因此可以说李贽把女性的地位更向上了一层。但是在对待妻子的态度上许筠展现出了与平时放荡不羁性格完全相反的人性化。李贽为了自己的求道生活抛弃官职和家庭,孤身一人深入山中求道,甚至62岁的时候削发为僧,彻底的达到了随心所欲生活的境界。相反许筠虽然痴迷佛教,但考虑到家庭的生计,甚至放下尊严向朋友索求官职。 第三,都对女性的才能表示认可。但是许筠只停留在认可和给予高度评价的层面。而李贽不但给予认可,更是接收女弟子,施行“男女共学”。并且他的著作当中也提到女性的能力并不比男性差,李贽的此发言及施行“男女共学”的行为,可谓使当时女性的社会参与更进了一层。虽然许筠的思想有所局限,但有一点还是与李贽很相似的。即将许兰雪轩的诗集刊行的开放行为,与李贽将平时和女弟子讨论学问来往的书信编辑成《观音问》一书出版的行为极其相似。虽然从实践的角度来看,许筠和李贽是有一定差距的,但与当时的文人相比,他们的思想都是极其进步的。也许从现代人的视觉来看,他们的思想都是有局限性的,但是就当时16世纪的社会而言,他们的思想可谓相当超前和进步的。 纵观全文我们可以知道李贽的思想比许筠的思想更为彻底,更具近代性。这主要归于他们当时所处的社会环境及家庭背景。即名门望族出身的士大夫家庭,加之极为保守的朝鲜社会使得许筠思想更具局限性,相反李贽从小就与外国商人接触,通过他们了解和吸取西方的文化,以至于思想上相对而言更加进步。
본 논문에서는 조선 시대에 살았던 蛟山 許筠(1569~1618)과 明 末에 살았던 卓吾 李贄(1527~1602)의 개방의식에 대한 비교를 해보았다. 개방의식이라는 말은 태도나 생각이나 사상 따위가 거리낌 없이 열려 있는 것을 지칭하는데, 허균과 이지의 사상은 동시대의 학자들과 달리 진보적이면서도 비교적 강한 개방의식을 보여주었다. 허균과 이지가 살던 당시에 사대부들에게 유교는 일생의 신념으로 여겨졌는데, 두 사람은 그들과 달리 유교를 맹종하지 않고, 불교, 도교, 천주교 등 다른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보여 유교의 ‘반도’가 되었다. 본 논문에서 두 사람이 지녔던, 유교와 어긋난 ‘이단’ 사상을 중심으로 비교를 하였는데, ‘이단’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뜻이 강하므로 ‘개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허균은 최초로 국문소설 『洪吉童傳』을 쓴 작가로,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주로 문학사적인 측면에 집중해왔으며 그의 개방의식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부 허균의 개방의식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이 또한 허균에 대한 심층적인 고찰이 아닌, 이지와의 영향관계로만 논의를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의 허균과 이지에 대한 비교연구는 주로 이가원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가원은 허균을 가리켜 '조선의 이지'라 하였는데, 이는 두 인물이 지닌 사상 사이의 유사점만 밝히고 있을 뿐, 세세한 차이에는 주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인 상황과 생애의 구체적인 사건들은, 이들이 만들어낸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과 밀접한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는데, 본 논문에서는 먼저 이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이들 사상의 유사점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또 세세한 차이점들은 무엇에서 연원하고 있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고찰 위에서 인간욕망 및 여성지적능력 긍정의 두 측면을 통해서 허균과 이지의 개방의식을 비교해보았다. 비교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애배경의 측면에서, 허균이 12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이지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잃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허균이 명문집안 출신인 반면, 이지는 신분이 낮은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는 상이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 출신성분은 다르지만 성장환경 속에서 반항적이고 저항적인, 강한 성격이 형성되어, 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역시 유사하다고 하겠다. 둘째, 두 사람은 모두 인간욕망을 긍정하여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과 관련하여서는 다소 차이점을 보이는데, 허균의 경우 성의 주체가 ‘남성’인 반면, 이지의 경우에는, 여자도 자유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과부의 재가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는 점 등에서, 여성의 지위를 한 층 더 끌어올렸다고 평가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부인에 대한 태도를 볼 때 허균이 더 인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지는 求道 생활을 하기 위해서 관직에서 사직하여 스스로 산속에 들어갔으며, 심지어 62세 때에는 삭발까지 해가며 철저하게 본성대로 살았고 매우 실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허균은 불교에 심취해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친구에게 관직까지 구하였던 인물로, 관념적으로는 개방적이지만 시대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처세를 취해가며 살아갔다고 하겠다. 셋째, 두 사람은 모두 여성의 지적능력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허균이 여성의 지적능력을 단지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만 그쳤던 반면, 이지는 여성의 지적 능력을 긍정했을 뿐만 아니라 여제자를 직접 받아들여 '男女共學'까지 실시하기도 하는 등 보다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차이를 갖는다. 이지는 그의 논저에서도 "여자들의 능력이 결코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다."라고 하며 여성의 지적 능력을 긍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사회참여를 한 발 더 이끌었다고 평가될 수 있는 부분들이다. 허균은 누이가 쓴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이지가 여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주고받은 편지들을 편집하여『觀音問』이라는 책을 출판한다는 점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비록 그 실천의 태도에 있어 상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당대의 지식인들에 비해서는 개방적인 사상을 공통적으로 지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볼 때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하겠으나, 당시의 사회에서 두 사람의 사상은 시대를 앞서간 매우 근대적인 사상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지의 사상이 허균보다 더 실천적이고 근대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이 살았던 사회배경과 가정배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사대부 집안 출신 및 보수적인 조선에 살았던 허균과 달리 이지는 어려서부터 외국상인을 만나 서양의 사상을 접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사상의 지향점은 유사하였다 할지라도, 그 구체적인 모습이나 실천방식에서는 이와 같은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