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적은 판보이쩌우의 일생에 걸친 정치역정과 논저를 통해 베트남 반 프랑스 민족주의가 아시아 각 지역의 혁명운동과 조우하면서 부단히 자신을 확장하고 새로운 길을 탐색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판보이쩌우는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이고, 베트남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은 물론 국민계몽운동을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추진해 온 인물이었다. 19세기는 세계는 제국주의가 팽배한 시기였고, 여러 서구 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 시기에는 한자 문화권에 속한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정치이데올로기 및 문화에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1858년에 베트남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1884년에 완전히 점령했다. 8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베트남을 식민지로 통치하였다. 이전시기의 베트남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고 베트남 지식인들 또한 대부분 한자를 사용하였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1919년에 베트남의 과거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1936년에 한자의 사용도 폐지했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아시아 약소국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각 약소국의 지식인들은 혁명의 길로 가게 되었고, 민족혁명을 위해 각지에서 분주하게 활동했다. 특히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일본 도쿄로 모이기 시작하여 혁명 활동을 도모했다. 다행히 그들은 한문에 능통하여 서로 교류에 지장이 없었다. 그들에 있어 민족해방을 우선할 것이냐 근대문명의 수용을 우선할 것이냐 하는 근본적 견해 차이가 있었다. 판보이쩌우는 민족해방을 우선시하였지만, 일본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동유운동(東遊運動)’이 실패하게 되었고 일본의 원조를 통해 군주제를 실현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판보이쩌우의 생각도 군주제에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판보이쩌우는 무장투쟁에 기대를 걸기도 하고 사회주의에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투쟁 방법에 따라 갈래가 나눴던 것은 동아시아 다른 국가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낯설지 않은 광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판보이쩌우는 초기에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무장투쟁으로 프랑스를 물리치고자 근왕운동(勤王運動)을 참가하거나 무장봉기 등 여러 차례의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1900년 이후의 판보이쩌우의 독립운동은 비록 유교적 관념이나 무력투쟁의 측면 등에서 이전 시기의 근왕운동과 맥을 같이 했지만 많은 면에서 베트남민족주의운동의 흐름에 있어 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특히 1900년에서 1908년 사이 유신회와 ‘동유운동’ 등을 통한 그의 활동에서 잘 나타나는데, 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위한 시도, 해외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한 새로운 민족주의운동 조류의 인식, 그리고 그를 통한 베트남의 민족의식의 고양 등이 새로운 변화의 주된 내용이었다. 한편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접하면서 점차 그의 대일(對日)관에 변화가 생겼고, 그는 점차 중국과 일본의 급진적 혁명파들과도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류와 그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사상적 발전이나 전환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중국과 일본의 혁명파 내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어떤 사상 또는 집단이건 간에 그것이 베트남의 독립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 접촉하고 필요한 것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