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은 지리학에서 유래한 논쟁적인 단어이자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학문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유럽 열강이 주도하는 세계의 시·공간적 맥락에서 지정학은 제국의 국정운영 전략과 관련된 보조학문으로서 기능했다. 특히, 지정학은 나치 독일에 의해 정치화 되어, 중앙유럽에서 독일의 야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를 계기로 지정학은 학문으로서 지위를 잃고 언급되는 것조차 금기시되기도 했으나, 냉전체제 이후 다각화되고 다층적인 국제 관계를 인식하는 틀로서 복권되었던 학문적 궤적을 갖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포스트 구조주의와 같은 사회이론의 인식론을 도입한 프랑스의 지정학과 비판 지정학은 기존의 고전 지정학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사유 하고, 복잡한 세계정세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로서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중등교육에서 지정학 교육의 도입은 여전히 고전 지정학적 시각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2023년 이스라엘-가자지구 전쟁과 같이 세계정세의 격변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관한 교육적 부응이 될 수 있다. 최근의 지리학계에서는 지정학적 이슈에 대해 어린이, 청소년을 지정학의 주체로 인식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영미권에서는 고등교육 중심 으로 진행되던 지정학 내용을 중등교육으로 확장해 적용한 연구 사례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2019년 바칼로레아 개혁으로 인해 지정학이 고등학교 교과로 신설되어 Histoire-géographie, géopolitique et sciences politiques라는 전공선택 교과가 등장했다. 국내에서도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처음으로 중·고등학교 지리 영역의 보통교과에서 지정학이라는 용어가 성취기준에 반영될 만큼 지정학의 교육적 도입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Ó Tuathail과 Lacoste가 제시한 고전 지정학 이후의 지리학에서 지정학에 관한 학문적 성취를 한국의 지리교육에서 도입하는 것의 지리교육적 함의와 가치를 가늠해 보고자 했다. 본 연구는 고전 지정학 이후의 지정학 논의를 바탕으로 고등학교 수업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교 간 공동 교육과정을 통해서 지리교육적 함의를 분석하고자 했다. 이에 세종특별자치시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캠퍼스형 공동 교육과정 Ⅱ’에서 고등 학교 1~3학년을 대상으로 2022년 2학기부터 2023년 2학기까지 총 3학기 동안 지정학 수업프로그램을 3회 운영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비판 지정학과 프랑스 지정학의 관점에서 지정학 수업프로그램의 내용 요소를 추출하고 지정학 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교육적 요구들을 지정학 수업프로그램에 반영하여 설계하였다. 설계한 수업프로그램은 세종특별자치시 캠퍼스형 공동 교육과정에서 강좌로 3회 운영되었으며, 참여적 실행연구로 진행되었다. 참여적 실행연구 방법으로 진행된 본 연구에서는 교사가 직접 수업 현장에 참여하여 현장의 이론과 실천의 변화를 동반하는 반성적 실천을 질적으로 연구했다. 연구 자료는 학생들과의 상호작용 및 학습 결과물로서 학습지, 교사 성찰일지, (비)대면 면담자료 등을 분석하여 지정학 수업의 이론과 실천의 변화 양상을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서 지정학 교육이 지리 교육적으로 어떤 함의를 갖는지 도출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내용 구성은 첫째, 고전 지정학과 비판 지정학, 프랑스 지정학의 학문적 논의를 정리하였다. 둘째, 우리나라의 지정학 교육의 맥락을 찾고 정리 했다. 셋째, 지정학 교육과 관련된 세 가지 측면의 요구를 분석하였다. 넷째, 역 량을 중심으로 내용을 조직하고, 수업 방법에서도 내러티브, 활동식 방법들을 통해서 구성주의 수업환경을 설계했다. 다섯째, 설계한 수업프로그램을 3회 실시 하였으며 반성적 실천의 과정을 통해서 이론과 현실의 변화를 추구했다. 여섯째, 도출된 결과를 바탕으로 지정학 교육이 지리교육에서 갖는 함의를 정리하였다.지정학 교육은 학생들의 수요가 중요해지는 고교학점제로의 교육제도의 변화를 앞둔 시점에서 지리교육의 현실적 필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 연구에서 지정학 수업프로그램을 통해 도출한 지정학 교육의 지리교육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의 문제를 지리교육에 도입함으로써 과정으로서 지리 지식을 교육에 적용할 수 있었다. 지리학을 복수의 사회가 모든 스케일의 공간을 표시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공간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며 지정학의 문제가 된다. 그동안의 지리교육은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추구하며 현실의 정치와 유리된 채, 사실적 지식을 추구해 왔다. 현실 공간의 변동성을 설명하는 프로세스보다는 결과적 지식, 통계를 중심으로 수업과 평가가 이뤄졌다. 지리교육에서 공간의 정치를 인정할 때, 비로소 현실을 역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할 수 있다. 지리적 지식을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정치의 과정으로 내용을 구성하면, 지리교육은 복잡·다층적인 지정학적 문제에 관한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사고함으로써 변혁적 역량 함양에도 기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청소년을 지정학의 주체로 인식하는 접근 방법을 도입하여 지리적 지식의 비판적 문해력과 세계 시민성을 함양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학습자들은 지리 지식을 재현된 것으로 사유함으로써 지리교육 내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학생들은 이러한 지식을 그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 지식을 문제화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비판적 문해력을 기르는데 지정학 교육의 접근방법이 기여할 수 있다. 반도성(性)론과 같은 포스트식민주의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지리적 결정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거나, 세계화의 가치중립적 접근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세계정세에 여전히 존재하는 국가 중심적 사고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분위기에 대한 학문적 부응으로 대안적인 국제 사회를 위한 공간적 사고를 제시해 줄 수 있다. 또한 지정학적 문제를 탐구하면서 상호 연결성을 강화하고 가치 판단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학습자의 세계시민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강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복잡·다층적인 세계정세를 읽는 시사적인 문제에 공간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지리교육의 새로운 교과로서 지정학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는 교육과정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정학의 모학문에 기반한 과목을 신설해 운영해 외교·통상 분야 등 관련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과목이자 매력적인 과목으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지정학적 사건이라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poly-crisis)를 대할 때, 지정학 교육은 공간과 공간의 새로운 연결 혹은 공간이 결여되어 나타나는 학문적 성과들을 공간을 중심으로 묶음으로써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지정학 교육은 폴리매스(polymath)처럼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다방면에 지식을 종합하여 복잡한 문제에 적확한 스케일을 적용하여 해결하거나 통찰력 있는 융합형 인재를 기르는 데 효과적인 교과가 될 수 있다. 교과학습을 통한 1%의 전문적인 인재가 아니라, 공간을 중심으로 지정학적 문제와 관련된 20%의 다양한 학문의 성취를 조합해 통찰력을 갖는 1%의 폴리매스들을 양성하는 지리교육의 강점을 부각하는 교과로의 가능성이었다. 지정학 교육의 현장은 실천적인 영역으로 사회-공간적으로 보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궤적이 교차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지속 적인 반성과 성찰의 과정에서 대두된 시행착오를 개선해 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이론과 실천을 개선하려 했던 노력의 결과물이자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 이다. 본 연구는 반성적 실천의 과정들이 연구의 형태로 진행된 교육학 연구로서 앞으로 근거기반 연구에서 연구기반 교육자들이 있는 교육공동체가 되기를 꿈꾼다.